[HQ!! 오이츠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SAMPLE
* 조직물 AU입니다.
* 원작 설정 날조 주의 (나이, 가족 관계가 원작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 모브캐 주의 (조연 혹은 엑스트라로 등장합니다.)
* 강제적인 행위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책 사양
A5 / 무선제본 / 성인본 / 126 페이지 (도비라 포함시 128 페이지) / 10,000원
2. 판매 방식
- 성인본이기 때문에 구매자 분의 신분증을 확인하며, 판매전 규칙에 따라 [실명, 우월주의 판매전 홈페이지의 아이디, 휴대전화번호] 정보를 받습니다. 이외에 폼 미작성 혹은 입금 문제에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트위터 아이디 또는 메일 주소 정보까지 받습니다.
- 온리전 시간 내 현매를 원하시는 분 혹은 온리전 참여를 못 하지만 통판을 원하시는 경우 수요조사에 참여해주시면 이를 반영해 책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조사 폼 주소 : naver.me/5ksI3M5Q )
3. 샘플
* 웹 가독성을 위해 줄 별 띄어쓰기 및 문단 나누기를 많이 해놨지만 실제 원고 상에선 이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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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오이츠키] 전력 60분 주제 : 벚꽃
“키다리 군, 나 이제 졸업해.”
“네, 알아요.”
너무나도 덤덤한 말투에 힘이 탁 풀린다.
“나 도쿄로 가면 자주 못 볼 텐데 괜찮아?”
“…”
예상은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꽤 서글프다. 늘 자신이 먼저 약속을 잡고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표현을 해댄다.
* * *
‘같은 감정까진 바라지 않아, 사귈래?’ 라 지나가듯, 터져나갈 것 같은 심장을 겨우 다스리며 덤덤한 척 꺼냈던 말에 시뮬레이션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그러던가요.’ 하고 바로 대답해줬을 때는 뛸 듯이 기뻤었다.
하지만 마치 연애를 남의 일인 것 마냥 이어가는 그의 태도에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시작한 연애라지만 이렇게 일방 통행으로 연애가 진행될 줄은 몰랐었기에 괜히 고백을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렇게 답답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도쿄의 XX 대학에서 날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전액 장학생에 용돈까지 얹어준다니,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만 연인-이라 불러도 될 진 모르겠지만-의 얼굴이 아른거려 “갑작스러워서 그런데 부모님과 상의한 후에 내일 대답 드려도 될까요?” 라 묻자 자신들도 바로 답을 바란 것은 아니라며 부모님, 학교 고문 선생님과 함께 상의를 한 후 사흘 내로만 답을 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꽤나 신사적인 대응에 더욱 믿음이 가 “감사합니다, 꼭 좋은 대답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끝 인사까지 덧붙였었다.
전화를 끊은 후 바로 츠키시마에게 연락을 해 “지금 만날 수 있어?” 라 물었다. 그러자 “무슨 일이에요?” 라는 물음이 돌아왔고 “…전화로 말하긴 어려워, 잠깐이면 되니깐.” 하고 조르듯 말을 이어나가자 “알겠어요. 사거리 쪽에서 만나요.” 라 말한 뒤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의 이런 행동에 조금 상처 받는다. 아무리 내가 먼저 시작한 관계라 상대적으로 을인 입장이라 할지라도 이건 아니잖아, 하고 서운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츠키시마를 기다리게 하면 더욱 안 좋은 결과가 벌어질 것을 알기에 코트를 걸친 뒤 사거리 쪽으로 뛰어 나간다. 코트 주머니에 양 손을 꽂아 넣고 헤드폰을 쓴 채 가로등 앞에서 빙빙 돌고 있는 츠키시마가 보여 더욱 빠르게 발을 움직인다. 그의 어깨에 손을 대자 헤드폰을 내리고는 그가 날 바라본다.
“늦어서 미안.”
“아녜요. 오이카와 씨가 나오기 편한 위치로 잡을걸, 제가 잘못 생각했죠 뭐.”
그런 뒤 대화가 끊긴다. 날 빤히 바라보는 츠키시마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을 하다 “저기 말이야, 만약에 내가 졸업과 동시에 도쿄로 간다면 어떨 것 같아?” 하고 직접적으로 물어본다.
그 물음에 츠키시마는 어떤 답도 시원스레 내놓지 않고 내 얼굴만 바라본다. 한참 침묵을 이어가더니 “오이카와 씨의 미래를 생각해보세요.” 라 말하고는 내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가버렸었다.
그 말의 의미는 뭐였을까?
‘도쿄로 가세요.’ 였을까 아니면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였을까?
그러나 재차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 * *
결국 난 떠나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놓칠 수 없었다.
거기다 츠키시마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붙잡아주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 역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몇 주의 시간이 흘러 지금 여기, 벚나무 아래서 우린 또 다시 서로를 향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뭐라도 좋으니 말 좀 해보지 그래?”
대답을 재촉하는 자신의 앞에서 츠키시마가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다. 이대로 끝내는 것이 맞는 걸까? 물리적인 거리마저 멀어지면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을 텐데, 괜찮을까? 하고 씁쓸하게 웃을 때였다.
히끅- 몸을 살짝 달싹이며 기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츠키시마를 바라본다. 그 떨림은 조금씩 거세지고 기묘한 소리 역시 귓가에 박힐 정도로 커진다.
“…츠키시마…?”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화를 내며 츠키시마가 날 쏘아본다. 하지만 그 눈은 물기가 어려 약해진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오이카와 씨의 미래를 생각하면 내가 웃으면서 보내줘야 하는 것이 맞아,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하겠다고 먼저 손을 내민 대학에 가는 것이 오이카와 씨의 5년, 10년 뒤 미래를 따져봤을 때 제일 맞는 결론이야. 내 욕심 때문에 당신의 미래를 망칠 수 없어. 그래, 머리로는 그걸 다 이해하는데… 난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당신이 없는 미래가 상상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꼭 그렇게 몇 번이고 물어봐야겠어요? 당신의 미래를 잘 생각해보라고 한 것이 답이었고, 그나마 내가 내 감정을 짓눌러서 당신을 보내주려 한 것인데 왜 그렇게 날 괴롭혀요?”
서럽다는 듯이 말을 토해내는 츠키시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난 할 말을 잃는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네 진심을 모든 것이 정해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도쿄로 가는 것을 무를 수도, 그렇다고 내게 진심을 내뱉은 널 놓을 수도 없는 나는 그저 네게 다가가 울먹이는 널 안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떨림이 겨우 멎어 들어가는 츠키시마에게 “왜 이제야 말했어, 붙잡았다면 난 네 말을 들었을텐데.” 라 말하자 “그럴 순 없으니깐. 아까 말 했잖아요. 내 욕심보다 오이카와 씨의 미래가 더 중요해.” 하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하여간 고집은.”
“그 고집 덕분에 오이카와 씨 미래가 보장된다면 난 더 고집 부릴 수 있어. 다만 부탁이 있다면.”
무슨 부탁? 이라 물으려는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츠키시마가 입을 맞춘다. 단 한 번도 먼저 스킨십을 한 적 없던 츠키시마의 돌발 행동에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내 가슴팍을 밀며 그가 말한다.
“2년 뒤 오이카와 씨 학교 쫓아갈 거니깐 한 눈 팔지 말고 기다려요. 방학 때 마다 미야기로 꼭 오고.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영상 통화해요.”
생각지도 못 한 귀여운 부탁에 웃음이 터진다.
“뭐…뭐에요! 왜 웃어요?”
“아니, 그 정도는, 나 해줄 수 있어. 매일 영상 통화 할 수 있고, 츠키시마가 나 보고 싶다고 빨리 미야기로 와달라 하면 친구 차 빌려서라도 미친 듯이 달려서 올 수도 있다고.”
“그건 안 돼, 위험하잖아요.”
“위험해도 괜찮아, 츠키시마가 원한다면 난 다 해 줄 수 있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런 의미로.” 하면서 벚나무를 살짝 흔든다. 떨어지는 벚꽃 잎 사이로 눈을 깜박이며 날 바라보는 널 붙잡아 다시 한 번 입을 맞춘다.
“불안해 할 필요 없어, 네가 싫다 해도 내가 계속 널 붙잡을 테니깐.”
말은 잘 해요, 하고 투덜거리는 츠키시마의 손을 붙잡으며 “사랑해.” 하고 속삭인다. 그 말에 고개를 휙 돌렸지만 귀가 벚꽃처럼 분홍 빛으로 물든 츠키시마의 모습이 귀여워 붙잡은 손을 더욱 세게 잡는다.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츠키시마와의 연애가 일방 통행이라 생각했던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단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이었을 뿐, 항상 내가 제안한 것을 귀 기울여 듣고 좋다고 생각하면 따라왔던 것 뿐이었다.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 도쿄로 떠나기 전 까지 츠키시마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야겠다 생각하며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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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오이츠키] 인연 (전력 60분 주제 : 봉숭아)
날이 많이 추워졌다. 아직 가을인데 벌써 겨울이 다가온 것 마냥 살갗을 에는 추위가 날 감싼다. 어쩌면 이 추위는 외로움과 분노에서 발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지금의 자신은 그 누구보다 외로이 괴로운 상황을 버텨야 하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침상에 눕고 싶지는 않았지만 온 몸이 피로한 탓인지 잠시라도 몸을 뉘이고 싶었다. 얇은 이불 한 장을 덮고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려본다.
자신의 이름은 츠키시마 케이. 평범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좋아하는 서책에 파묻혀 하루 하루를 지내던 이였다. 여섯 살 터울의 형님과 친우처럼 지내고 어딜 가도 형님의 손을 꼭 붙잡고 다니던, 달콤한 것을 좋아해 장이 서거나 축제가 열릴 때 마다 형님을 졸라 달콤한 과자를 얻어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자신의 부탁은 언제나 형님이 들어주었다. 물론 형님이 들어줄 수 없는 일을 부탁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가며 어리광을 부렸기에 형님의 울타리 내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어린 아이가 되어도 상관 없었다. 장남이 아니기에 굳이 관직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관직에 나가더라도 차남이기에 굳이 위를 향해 걸어나갈 필요가 없이 적당히 삶을 살아나가면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적당한 삶, 가문의 차만 심하지 않다면 마음에 드는 규수가 생겼을 때 혼례를 치를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었는데 불과 두 달 전 일이 틀어져 버렸다.
=
그 날은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었다. 누군가 높으신 분이 온다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자신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형님과 함께 밖에 나가 축제를 구경할 수 있단 것이었다.
2년 전 관직에 발을 들인 형님은 반년 전부터 유독 바빠져 자신과 얼굴을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축제가 있는 주에는 그 주를 완전히 쉴 수 있게 해 줘 축제 때는 온전히 일주일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축제 주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냐 물었을 때 형님은 ‘그 분께서 특별히 하사하시는 보물 같은 하루들이지.’ 라는 질문에 살짝 빗겨난 애매한 답을 했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형님의 입으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왕위 계승에서 살짝 빗겨난 태자 중 한 명이라는 것으로 알고는 있다. 답을 피하는 형님에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지난 번에 먹지 못 했던 과자를 먹어 봐야지- 안에 달콤한 팥 앙금과 졸인 밤이 들어있다는 것이 참 맛있어 보이던데, 하면서 즐겁게 옷을 꺼내 입고 형님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붙잡은 형님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마음이 편해지는 그 느낌이 좋아 조금 더 세게 형님의 손을 붙잡아 본다.
“오늘은 인파가 심하니 손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집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형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 아이가 아니니깐요.”
“집까지 갈 수 있다 해도 걱정이 되니 하는 말이다.”
굳은 표정으로 핀잔을 주는 형님의 말에 “이렇게 손을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형님을 잃어버리겠어요. 걱정은 하지 마시고 앞을 잘 주시해서 걸으시지요, 잘못하다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실 수도 있으니깐요.” 하고 농을 치며 웃자 형님의 표정이 탁 풀리면서 “다른 이들과 의견을 나눌 땐 어떻게든 내 의견을 관철해 나가는 나인데, 이상하게도 네 말에는 못 이기겠단 말이지.” 하고는 내 이마를 툭 친다. 칫- 하고 토라진 표정을 짓는 자신에게 “귀애한다는 행동에 그리 성을 내는 것이냐. 내 이러니 너를 아직도 여섯 살 꼬마 아이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냐.” 하며 웃는다. 괜히 그 웃음에 낯이 간지러워져 “매번 가는 주전부리 가게에 먼저 뛰어가 있을 테니 값을 치르러 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형님?” 하며 손을 놓는다. 천천히 가거라, 잘못하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하느냐- 그 쪽은 사람이 많으니 돌아서 가자꾸나- 하는 형님의 말에도 늘 가던 길 쪽으로 발걸음을 빨리 하던 때였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함께 인파에 밀려 들어간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높으신 분이 이 길로도 지나간다 했었지? 하필 그 시간에 내가 끼어들었구나 하면서 최대한 바깥 쪽으로 몸을 빼낸다. 어떻게든 높으신 분의 행차 길을 보겠다며 길 안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과 정 반대로 움직이려니 힘겨웠지만 옷 매무새가 좀 흐트러진 것을 제외하면 별 다른 문제가 없이 빠져 나왔다. 이제 모퉁이의 저 집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 삼십 걸음만 하면 늘 가던 주전부리 가게가 나올 테니 거기 가서 쉬어야지 하고 빠르게 모퉁이를 돌 때였다. 무언가와 부딪혔단 자각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든 생각은 ‘나이가 몇인데 넘어져 옷을 버렸다 말할 것인가…’ 하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함께 넘어진 이는 괜찮은지 살피려 고개를 들려 할 때 “괜찮으십니까?” 라는 물음을 먼저 들었다.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는지요, 의복도 새로 꺼내 입으신 것 같은데 저 때문에 버리신 것은 아닌지…”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았다. 당황한 기색은 엿보였으나 침착한 그 목소리에 오히려 자신이 잘못한 느낌이 들어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급히 길을 걷다 이런 것이니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라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는 꽤나 고운 옷을 입고 있었다. 곱다는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남색의 옷에 그보다는 연한 실로 소매 끝 부분에 자수를 넣은 것이 곱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상대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단 사실에 눈을 마주친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목소리만 들었을 땐 예의 바르고 침착할 거라 여겼는데 지금의 눈빛은 그 범주와는 다르다. 격정적, 이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몸이 그 쪽으로 쏠린다. 아니, 그에게 안기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드디어 찾았다.”
찾았다니, 무엇을? 대체 왜 처음 보는 사내가 날 안고 기쁘다는 듯 저리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형의 표정은 왜 그리 어두운 것이었던 걸까, 그 당시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설마 그 사람이 형이 모시고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이 나라의 3 태자이며, 그 사람이 내게 집착하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딘지 모르게 적막했다. 입술을 꽉 깨무는 형님의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물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라도 말을 걸었다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눈물이 터져나올 것처럼 보여서 단지 조용히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케이.”
형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형님은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다정한 눈빛, 따스한 손을 자신에게 내밀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대신했던 분이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네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아깝다 말하던, 조금은 유난스러운 형님이었는데 그런 형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단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답을 할 때를 놓쳐버렸다.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오늘의 일이.”
갑작스런 형님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하며 신경을 곤두세워본다.
“너도 알다시피 반 년 전부터 나는 꽤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단다. 그게 다 관직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네가 뵈었던 그 분, 제 3 태자의 스승이 되었기에 그런 것이었단다. 네게는 미안했지만 늘 홀로 있는 그 분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쉽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단다. 처음엔 너와 비슷한 나이라 더 관심이 갔던 것일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볼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컸었지. 왕위에 직결되지는 않았지만 직결될 수도 있는 자리,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자리,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자리, 그것이 태자의 자리라는 것을 지난 2년 간 뼈저리게 느꼈었기에. 그런 그 분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천천히 그 분께 다가갔고 반년 동안은 가끔씩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 사이가 되기도 했단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그 분은 경계심이 많으셔서 몇 년을 옆에서 수발 든 시종들도 잘 믿지 않는다시더군. 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그리 호의적인가 이유를 몰랐었지.”
거기까지 얘기한 형님은 잠시 말을 멈추시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 새 공기가 차가워지고 하늘빛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 분께서는 가끔 옛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 할 정도로 어렸던 시절, 호위와 시녀들의 눈을 피해 궁 밖으로 몰래 나왔다가 만나게 되었던 얘기라던가.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 하였지만 그 때 만나게 된 이를 그리워하는 듯 하였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던 형님의 눈이 나에게로 내려 앉았다. 따뜻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그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형님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분의 곁에 네가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라는 말이었다.
=
지금 생각해도 온 몸이 떨릴 정도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 일까. 내게서 평범한 삶을 앗아간 이의 옆에서 ‘반려’ 라는 명목 하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사실이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어째서 형님은 내 손을 순순히 놓은 것 일까. 누구보다 날 아낀다 말하던 그 입술로, 늘 내 행복을 바란다던 그 입술로 어찌 ‘태자님께 케이를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라 말한 것 일까.
원망스럽다, 너무나도 원망스러운데 그럴 수 없다. 내 손을 끌어당겨 잠시 깍지를 꼈던 형님의 손이 떨렸던 것이, 내 얼굴을 쓸어 내리며 ‘행복해야 한다.’ 라 말했던 것이, 내 손에 늘 형님이 지니고 다니던 옥패를 쥐어줬던 것이, 그 모든 기억들이 내게서 형님을 미워하지 말라 외치는 것만 같아서 차마 미워할 수 없다. 내게서 다정한 형님의 기억을 앗아갈 수는 없다. 내게서 그런 형님에 대한 애착을 무너뜨릴 수 없다. 뭔가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완고하고 명석하며 가족애가 넘치는 형님이 이토록 쉽게 날 내어준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 없으니깐.
하지만 ‘그’는 미워할 것이다. 평생 미워하고 미워하며 미워할 것이다. 미움이 가득 차 흘러내리면 그 때는 날 놓아주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몸을 웅크린다.
“츠키시마.”
상념을 깬 것은 지금까지 떠올리던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인 오이카와 토오루의 목소리였다.
“먼저 자도 된다 말했거늘, 혹여 잠자리가 불편하여 잠에 들지 못 한 것 인가. 사흘 뒤 아키테루 공이 입궐할 때 그대가 사가에서 쓰던 침구를 가져와 달라 하겠네.”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어찌 그리 쉽게 형님의 이름을 부르실 수가 있습니까, 지난 반 년간 제게서 형님을 빼앗아 가시고 끝내는 형님과 제 사이를 갈라 놓으시고선 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당신은 잔인하시군요. 제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는 제 옆에 당신만 남아 있다니 이 무슨 불공평한 처사입니까. 당신이 제 1 태자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 입니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말들이 마구 엉켜 들어간다. 다만 그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 한 채 구부린 몸을 더 둥글게 말아 웅크린다.
“대답 대신 건드리지 말라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 말에 입술을 깨문다. 어차피 그리 말해봐야 그 쪽이 날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다. 그 쪽이 나보고 살라 하면 사는 것이고 죽으라 하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라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데 한숨 소리가 들린다.
“걱정은 말게나. 예전부터 그대가 말하지 않았는가,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다만,”
다만, 하면서 다가오는 소리에 두 눈을 꽉 감아 버린다. 처음부터 날 바라보던 눈빛이 싫었다. 마치 날 집어 삼킬 듯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눈빛,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뜨거운 눈빛이 날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 눈빛이 생생해 두려울 정도다.
“그 쪽은 열기가 잘 가지 않으니 내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달래는 듯한 말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 질릴 때까지 침묵하고 기다릴 뿐.
“하여간 그 고집은 변치 않는구나.”
변치 않는다, 라는 말에 대체 무엇이? 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던 그 날도 드디어 찾았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 사람과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려고 할 때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자신의 몸 위를 덮는다.
“이 쪽으로 오는 것이 싫다면 하다못해 이불이라도 잘 덮거라.”
평소 성격 같았으면 이불도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침상 근처의 거울에 비친 그의 표정이 왜 그리 서글퍼 보이는지, 이마저 거절했다간 상처 받을 것만 같아 그저 덮어준 이불을 푹 들쓸 뿐이었다.
=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 원래 제 잠자리가 아니고서는 익숙지 않아 잠을 잘 이루지 못 하는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오늘 같이 잠자리도 바뀌고 마음이 불편한 날 이렇게 편히 잠이 든 것일까. 안 꾸던 꿈까지 꾸고.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함부로 건드리는 것 아냐.” 라 단호하게 말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향한 곳은 어떤 남자 아이였다. 꽃을 꺾은 손을 뒤로 감추고 있는 듯한 품으로 보아하니 몰래 꽃을 꺾은 아이에게 자신이 훈계를 내리는 중인 듯 하다. 그 아이가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기억이…나지 않는다?
“그래, 꽃이 예쁘지. 하지만 마음대로 건드리거나 꺾어선 안 돼. 이렇게 꺾어버리면 처음 볼 땐 예쁘지만 시들어 버릴 거야. 시들면 넌 버릴 거잖아. 너야 꽃을 보고 좋아했으니 목적을 이뤘다지만 저 꽃은 뭐가 되는 거지? 예쁘게 피어났지만 제 명대로 살지 못 하고 네 손에 꺾여 그대로 끝이 나버렸잖아.”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훈계를 하는 품이 자신답다. 제법 조리 있게 말하고 있는걸, 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꽃을 꺾은 아이가 무언가 말을 한 듯 하다, 그 말에 어린 자신이 고민을 하다 말을 꺼낸다.
“어쩔 수 없지. 이미 꺾어버린 것은. 그렇지만 네가 이 꽃에게 미안하단 마음이 그렇게 크다면… 음… 아, 맞다, 전에 어머님과 사촌 누이께서 이 꽃으로 예쁘게 손톱을 물들이는 것을 보았었어.”
그 말에 꽃을 꺾은 아이가 자신도 손톱을 물들이고 싶다 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 라 말하고는 어머님께 가서 두 아이 모두 손을 맡기지는 않았을테니.
“지금은 불편하지만 하룻밤 꽁꽁 싸매고 잠이 든 뒤 풀면 예쁘게 물들 거야. 자, 나도 이렇게 했으니깐 우리는 하나야.”
어째서인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봉숭아 물을 들이고 환히 웃는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과 함께 손을 물들인 자신 또래의 남자 아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립다. 이제껏 이런 꿈도, 이런 기억도 없었는데.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 딱딱한 경어도 쓰지 않고, 또래에게 쉽게 말을 걸고, 함께 웃고 떠드는 이 따뜻한 기억에서 깨어나오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눈이 떠진다. 마치 그 꿈이 현실인 것 마냥 생생해 손 끝을 바라보지만 봉숭아 물을 들인 흔적이 없다.
“무엇을 그리 보느냐.”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옆을 바라본다.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내 시선을 따라 손 끝을 한 번 바라본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말을 꺼낸다.
“손 끝이 허전한 것이냐.”
“답을 드려야 하는 문제입니까.”
자신의 말에 그가 놀란 듯 했다. 그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면.
“어떤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꾸라도 해주니 마음이 그나마 나아지는구나.”
“그 쪽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그 쪽의 거듭되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번거로울 것 같아 말한 것이니.”
“이유야 어찌되었건 말을 해줬다는 그 자체가 나는 행복한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헤실헤실 웃는 그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왕권이 어찌되고 왕위 계승이 어찌되고의 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12명의 태자들 중 손에 꼽히게 출중한 재능을 가진 황자가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3 태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깐. 그런 사람이 이렇게 느슨한 모습을 보인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웃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명령을 하는 것인가?”
“왕위 계승 1순위는 아니더라도 3 태자라면 어쨌거나 많은 사람을 부리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이리 느슨한 표정을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그가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한다. 자신의 말이 대체 어디가 우스운 것인지, 아니 우스웠다쳐도 면전 앞에서 이리 웃어도 되는 것인지, 가뜩이나 미운 그가 더욱 미워진다.
“웃은 것은 미안하네. 허나 어젯밤까지의 그대 태도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는데 하룻밤 자고 나더니 내 일거수일투족에 어깃장을 놓고 단속을 하는 품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런 것이네. 역시 내가 그대를 반려로 고르기를 잘 한 것 같구나.”
웃으면서 내 한 쪽 뺨을 만진 뒤 귓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내리는 그에게 “마음대로 제 몸에 손을 대도 괜찮다 허락해 드린 기억은 없습니다.” 라 쏘아 붙였지만 “반려의 뺨을 쓰다듬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인가.” 하며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에 다시금 뭐라 몰아 부칠 수가 없었다. 단지 현실처럼 생생했던 꿈을 떠올리며 다시금 허전한 손 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
이 곳에서의 삶이 죽도록 싫을 거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평생 그를 미워하며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지도 못 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은 딱 잘라 행동하지 못 하는 것일까.
휴- 한숨을 내쉬며 서책 하나를 집어 방 밖으로 나온다. 쌀쌀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흘러 넘치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 잠식될 것만 같아서였다.
어제는 첫 날 꿨던 꿈에 이어지는 내용의 꿈을 꾸었었다. 손 끝에 봉숭아 물이 잘 들어있는 그 아이와 다시 만난 꿈을. 그 아이가 뭐라 했더라. 봉숭아 물이 첫 눈 올 때까지 남아있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들었다며 떠들어 댔던 것 같다. 내게 뭐라 뭐라 말을 한 뒤 손을 한 번 꽉 잡고는, 얼굴이 새빨개져 뛰어가는 모습도 보았지만 그 아이의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짤막한 기억이지만 어쩐지 입가에 웃음이 걸쳐져 손을 꽉 쥐어보지만 내 손만 느껴질 뿐 그 아이의 따뜻한 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다. 열흘 간 오이카와 토오루와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침상에 누워 잠을 잤지만 그가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거나 날 범하겠다며 옷을 흐트러뜨리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처음 봤을 때 ‘찾았다’ 라는 말을 하고 그 말을 한 지 두 달 만에 자신을 반려라며 집에 들이고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반려라 들이면서 혼례를 원치 않을 테니 그대가 원할 때까지 혼례를 미루겠노라 말하는 것 역시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내 멋대로 그대를 반려로 데려가는 것이니, 그대가 원치 않는 것은 하지 않겠다’ 라며 날 데리고 왔던 말이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 3 태자라는 그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그의 성격이 고압적일 거라 답을 내렸었지만 막상 지내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도 의외였다. 자신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대답을 하더라도 싸늘하게 해버리면 화를 내며 손찌검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어떤 훈계의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실이 불편했다. 외로움을 타는 것이 분명한 그에게 씁쓸한 표정을 짓게 만든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간혹 닿는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은 우연히 손이 맞부딪힐 때,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내 머리칼을 쓸어 내릴 때, 혹은 그가 자신의 다짐을 잊고 지금까지 세 번 정도 내 볼을 쓰다듬은 정도였었다. 자신에게 닿는 그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자신도 모르게 붙잡아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건 아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다, 이는 필시 형님의 손을 붙잡고 다니던 자신의 버릇이 남아있어 그런 것이야.’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서책에 집중한다.
“그렇게 책을 보면 목이 아프지 않은가?”
뒷덜미에 닿는 손길에 몸을 움찔거리자 “함부로 몸에 손대지 말라 했는데 내 잊고 그만…” 하는 멋쩍은 목소리와 함께 내 옆에 그가 앉는다. 이런 그의 말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뭐라 화를 낼 수 없게 먼저 선을 그어버리지 않는가. 이러니 미워하려 해도 온전히 미워할 수가 없게 된다.
“바깥 공기가 찬데 어찌 밖에서 읽고 있는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이 많아 바람을 쐬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많다라.”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그에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라 쏘아 붙이자 “잠시만이라도 괜찮다면 손을 내밀어보지 않겠는가.” 라 답을 한다. 가뜩이나 그를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하지 못 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진절머리가 나던 참이었는데…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손을 내밀어 본다. 혹여라도 그에게 손이 잡힌다면, 혹여라도 그의 손이 너무 따뜻해 놓을 수 없다면, 그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함께.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명주 솜 목도리였다.
“추위를 많이 타면서 목을 내놓고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 하나 장만해 보았네.”
그러고는 다시 내 눈을 바라보는 그에게 “…고맙습니다.” 라는 대답 이외에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취향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목도리를 매었을 때 무늬가 보이도록 해 보았네.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수를 뜯어낼 수 있다 하였으니 개의치 말고 말을 해주게.”
그 말에 목도리를 찬찬히 살펴본다. 소담하게 피어 오른 봉숭아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실로 멋스럽게 수를 놓은 것이 여간 훌륭한 솜씨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를 놓아줬을 이를 생각하면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싫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름다워 목에 매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마음에 든다면 되었다. 허나 그렇다 하여 제 기능을 잃게 하지는 말거라. 그대의 목이 쓸쓸해 보여 장만한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 말에 잠시 멈칫한다.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어째서 저 말이 익숙한 것일까.
멈칫한 자신을 눈치채지 못 하고 “계속 바람을 쐬며 서책을 읽고 싶다면 목에 두르고 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 말하며 내 목을 바라보던 그가 지나가던 시동을 불러 차를 내오라 한다.
“차까지 내오게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그리도 불편한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반려가 찬 바람을 맞는 것이 걱정되어 내 몸으로나마 바람을 좀 막아주자 하는 것이니 어여쁘게 여겨주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안 되겠는가.”
그 말에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냐고, 태자의 건강이 제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냐 묻는 자신에게 “지난 번 아키테루 공이 입궐했을 때 그대가 추위에 약하다는 말을 들었었네. 평생을 함께 해야 할 반려가 아픈 것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러는 것인데.” 라 말하며 빙긋 웃는다.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목도리를 메어주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거절을 해야 한다, 라 머리로 생각하지만 그러시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에게 다시금 환멸감이 든다. 떼어내지도 못 하고 이게 무엇 하는 것인가. 다시금 답답해지는 와중에 때마침 시동이 방 안에서 좌탁을 내어 와 다완을 올려 놓는다. 따뜻한 차를 입에 대니 추위가 조금은 삭혀지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찻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어째서 봉숭아 입니까.” 라 묻는다.
다완을 들어 올리려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날 바라본다.
“봉숭아를 수놓은 것이 항간에 유행하는 것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아니면, 하며 마른 침을 삼킨다. 처음 마주친 그 날, ‘드디어 찾았다’ 던 그의 말. 함부로 만지지 말라 하지 않았냐는 그의 말. 그것도 ‘예전부터’ 라는 단서를 붙여서.
“…혹여라도, 저희 형님께 말씀하셨다는 어렸을 적 만났다던 그 사람이 저였던 것입니까.”
그 말에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이 처음 이 곳에서 꾼 꿈에 만난 어린 아이의 웃음과 겹친다.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냐.”
“온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
“나는 듯이라니, 조금은 기분이 상할 것 같구나.”
“벌써 십수 년도 전의 일을 기억하시는 태자가 신기하실 따름이지요.”
“하여간 여전히 말 대답은 잘 하는구나.” 라 말하던 그가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다른 곳은 다 색이 빠졌는데 그 해 첫 눈이 올 때까지 왼 손 약지의 손톱 끝은 붉은 기가 남아있었지.
그대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모친께서 봉숭아 물을 들여주실 때 농 삼아 했던 말이 있었다네.
첫 눈이 올 때까지 이 물이 빠지지 않는다면 연모하던 이와의 연이 이어질 것이라. 그래서 그대에게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려로 삼겠다.’ 라며 소리 치고 도망을 가버렸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 인가.”
꿈 속에서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잡고 한 말이 그것이었던가, 나름 수줍은 고백을 했던 것이었구나 하며 머리를 긁적이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 솔직히 대답을 한다.
“하긴, 아예 날 기억하지도 못 했으니 그 일은 당연히 기억치 못 하겠구나.”
“헌데 어찌 저입니까.”
그 물음에 오히려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 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어찌 몇 번 만나보지도 않았던 저를 반려로 삼겠다 여긴 것입니까?” 라 풀어서 되묻는다.
“어째서 그대인가, 라 묻는다면 대답은 단 하나 뿐이지 않을까. 내게 그대처럼 호되게 가르침을 주면서도 따스하게 끌어 안아준 이가 그 때 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없었기 때문이지. 거기다 난 한 번 내 입에서 뱉은 말은 어기고 싶지 않았기에, 내 힘으로 그대를 다시 찾아 반려로 삼은 뒤 함께 여생을 누리고 싶었을 뿐이었네.”
평온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에게 어떤 답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알지 못 해 입술만 달싹인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과는 달리 몸은 쉽사리 움직여 그에게로 다가간다.
“날이 춥습니다. 이러다 태자께서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더 이야기를 나누시죠.”
먼저 닿은 내 손에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는 그를 눈치채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을 끌어 당겨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고 보니 그 해, 내 손에 물들였던 봉숭아 물도 거의 색이 빠졌지만 첫 눈이 올 때 까지는 남아있었다. 그걸 보고 어머님께 자랑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 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봉숭아 물을 들인 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 때부터 인연이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라는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문을 닫았다.
=
* 과욕이 넘쳤습니다ㅇㅅ;;ㅇ)_ 고전(?)의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처음인 듯 한데 너무.. 어렵..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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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창 바쁠 시기라 형과 연락도 잘 하지 못 했다. 물론 자신의 성격 상 먼저 연락을 하는 것 자체를 잘 못 하기도 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뻗대지 말고 먼저 문자라도 보내볼걸, 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럴 일은 없지만… 오늘 형이 왔으면…’ 하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제 오니, 케이?”
“…형?”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형이, 그것도 평일에 집으로 돌아왔을 거란 생각은 못 했기에 현관 앞에 멍청하게 서서 형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들어와.”
밝게 웃으며 가방을 달라며 내게 손을 내민 형에게 가방을 건넨다.
“어…어떻게 왔어?”
“요즘 집에 너무 못 왔잖아. 어머니, 아버지도 뵙고 싶고 너도 보고 싶고. 집에 안 보내주면 일 안 한다고 투정을 부렸어. 그랬더니 이렇게 짜잔, 집에 올 수 있게 되었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회사 생활 해보지 않았던 자신조차도 알겠지만 굳이 신나서 말하는 형의 말에 어깃장을 놓고 싶지 않아 “그래, 잘 됐네.” 라 대답한다.
“뭐야, 케이는 기쁘지 않아? 한 달 반 만에 보는 형의 얼굴인데 좀 더 반가워해 주면 안 될까?”
실망했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의 뺨을 톡 치는 형에게 “어떤 식으로 반가워 해주면 될까?” 라 묻자 “막 형 만나서 반갑다고 너무 좋다고 펄쩍 거리며 뛰고 나한테 안기고 눈에서 꿀 떨어지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점점 이어지는 말들이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말들 투성이라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자 “어, 어, 케이? 뭐야 그 표정? 기분 나쁘다는 거야?” 하며 형이 일부러 과장된 제스처를 취한다.
“형은 이렇게나 동생을 생각하고 그러는데, 하나 밖에 없는 내 사랑스런 동생이 이런 식이면 형은 너무 슬퍼요, 슬퍼.”
“…형 아무리 나한테 애교를 부려봤자 내가 똑같이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안타깝네. 케이가 형아, 형아 하면서 애교 부리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모습도 못 보고, 형 슬프다.”
훌쩍거리는 시늉을 내는 형의 등을 가볍게 치면서 “계속 놀리면 화 낼 거야.” 하며 형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방으로 들어간다.
“화 내지마- 형이 반가워서 그런 거야. 다신 안 그럴게. 형이 케이크 사왔으니깐 같이 먹자.”
실은 화가 나지 않았었지만 문을 두드리며 화해를 청하는 형의 말에 화가 풀린 것처럼 “다신 안 그런다고 했으니깐 나가는 거야?” 하며 방 밖으로 나온다.
형이 사 온 케이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쇼트 케이크였다. 시트 자체는 촉촉하고 부드럽고 크림은 산뜻하다. 신선한 딸기가 시트 사이에 슬라이스 되어 적절히 들어가 있고 케이크 위 쪽은 도톰하게 올라온 크림 층에 커다란 딸기들이 속속들이 박혀 있다. 딸기에 설탕 옷을 입히지 않은 것 역시 마음에 든다. 맛을 음미하며 정신 없이 포크를 입에 갔다 대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껴 옆을 바라본다.
“…뭐…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아, 아니 그렇게 맛있나 싶어서. 입에 크림을 묻힐 정도로 말이야.” 하면서 형이 내 입가를 가리킨다.
형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입가에 손을 갔다 대자 크림이 묻는다. 앗, 하고 닦아내자 “휴지 줄까?” 하며 형이 티슈를 건넨다.
“고마워.”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자 “잘 했어.” 하며 형이 내 등을 토닥여준다.
“잘 하긴 뭘. 근데 형은 왜 안 먹어?”
“형은 케이가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그게 말이 되나, 배가 부르는 건 나지. 자, 형도 먹어.”
케이크 한 쪽 귀퉁이를 푹 찔러 내린 뒤 형의 입가로 갔다 대자 “케이가 이렇게 형도 다 챙겨주고, 어른이 됐어.” 하며 감동했다며 난리를 피운다. 계속 그러면 또 짜증낸다, 하고 말하자 형이 장난이라니깐? 하고 웃으며 입을 열어 케이크를 받아 먹는다.
“맛있지?”
“응, 케이가 정신 없이 먹을만한걸? 맛있어.”
씨익 웃으며 형 역시 포크를 집어 함께 케이크를 먹기 시작한다. 이렇게 형과 케이크를 함께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늘 바쁜 회사 생활에 엇갈리기 일쑤였는데, 이런 식으로 소소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참 즐겁다.
오늘은 잠을 잘 잘지도 모르겠다, 라 생각을 하며 형과 그 간 쌓인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시계를 바라본 형이 “시간이 늦었네, 케이, 내일 학교 가려면 일찍 자야지?” 하며 날 방으로 밀어 넣은 지 한 시간. 침대 위에 눕기는 했는데 여전히 불면증이 날 괴롭힌다. 삼십 여분을 뒤척이다 결국 안 되겠어 형의 방으로 다가가 노크를 한다. 네, 들어오세요- 하는 말이 들리자마자 “나, 케이인데.” 하며 문을 연다.
“어? 케이? 자러 들어간 것 아니었어?” 하며 모니터를 바라보던 형이 뒤를 돌아본다.
“…잠이 안 와서.”
“그래? 근데 형 아직 일이 안 끝나서.”
“…저기 형.”
“응?”
“바쁜데 미안하지만, 그냥 옆에 누워서 있는 거… 안 될까?”
“안 될 것은 없지.”
불을 끄는 형에게 “안 돼, 눈 나빠져.” 라 말하자 “괜찮아. 불 끄는 것보다 컴퓨터 화면 뚫어지게 쳐다보는 쪽이 더 눈에 안 좋을걸? 거기다 이걸 켤 거니깐. 괜찮아.” 하며 무드 등을 켠다.
“요새 잠 잘 못 잤어?”
“…알고 있었어?”
“그럼, 네 눈 엄청 빨간걸. 토끼처럼 말이야.”
“…그래?”
“넌 예전부터 그랬잖아. 한 번 잠 안 오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이건 잠 못 자는 거.”
“…기억하고 있네.”
“그럼. 네가 살아온 16년 동안 단 한 순간도 내가 없었던 날은 없었으니깐. 어쩌면 너보다 너에 대해 내가 더 잘 알지도 모른다고.”
지나가듯 말하지만 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으며 날 위로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진다. 날 바라보는 형의 눈빛 역시 따뜻해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러고 보니 형은 늘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애교도 없고 가끔은 퉁명스럽게 대해도 형은 늘 내게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싫을 때도 있을 텐데 전혀 그런 내색 없이.
그러다 형의 말이 떠올랐다. 형에게 애교를 부리던 모습, 이라는 말. 조금은 부끄럽지만 형이 원하는 대로, 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동생답게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의 무리한 부탁을 해본다.
“잠깐이라도 괜찮으니깐 형 손 좀 잡아도 될까?”
그 말에 키보드를 두드리던 형의 손이 멈추고 형의 시선이 날 향한다. 날 빤히 바라보던 형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래. 그렇게라도 네가 잠 들 수 있다면.” 이라 말한다.
“형 일 해야 하는데 내가 시간만 빼앗는 거 아닌가 몰라. 참 나쁜 동생인 것 같아.”
“아냐, 아냐. 일은 회사 가서도 할 수 있는 건데. 집까지 와서 케이와 시간을 많이 못 보내는 내가 더 나쁘지.”
“…형은 나쁘지 않아.”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케이.”
낮게 깔린 형의 목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내 손을 감싼 형의 손이 따뜻한 것도 한 몫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내 머리칼을 쓸어주는 형의 행동에 조금씩 눈이 감기고 일정하게 숨이 골라진다.
“졸리면 자도 괜찮아.” 라는 말과 함께 형이 내 손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움직인다. 분명 잠이 들 것 같은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손을 빼려는 것이겠지만 그건 싫다. 부드럽고 따뜻한 이 느낌 잃고 싶지 않아.
“…으응.”
손을 빼려는 형에게 투정을 부리듯 콧소리를 내며 형의 손을 붙잡자 “…케이, 완전 애 같아. 어쩜 우리 동생 이렇게 귀여운 거야?” 하며 내가 졌다, 하며 형이 내 손을 맞잡아 준다. 손바닥 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다시금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조금씩 잠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왼쪽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걸린다.
“굿 나잇, 케이.”
이마에 살짝 닿는 형의 입술이 따뜻하고 부드럽다. 오늘은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좋은 꿈 꾸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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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카게츠키] 맞잡은 손 (쓩님 생일 축하기념 글)
부딪힌 입술을 파고 들어온 그는 내 영혼까지 들이 마실 것처럼 날 놓아주지 않았다. 숨을 쉬기 힘들어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내 눈가를 지그시 누르는 것을 보아 그 역시 이 사실을 눈치 챘음에 틀림없지만, 오히려 날 더 거세게 자신의 품 안으로 가둔다.
집요하게 날 가둬두던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그만-” 하고 저항의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어째서.” 하고 묻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차라리 왜 멈추려 하냐고 화를 낸 것이었다면 오히려 더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몇 달 간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투르다는 것 이었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면서도 그걸 드러내는 방법을 몰라 허덕인다. 운이 없게도, 그런 그의 특성을 난 캐치해냈고, 그는 자신을 알아봐 준 내게 집착했다. 사실 이런 상황에 처했어도 밀고 들어오는 그를 밀쳐내면 끝날 일이었을 텐데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요.”
그 말이 고삐를 풀어버린 것일까, 귓불을 깨물며 그가 내게 더욱 거세게 달려든다.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를 꽉 껴안는다.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찾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그의 단단한 등을 어루만지며 “카게야마….”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자그마한 전시회장 이었다. 복잡한 생각들에 휩싸여 무작정 길을 걷던 나는 들어와 달라는 듯이 활짝 열려있는 유리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시간’ 이라는 주제로 여러 명의 아마추어 작가들이 찍은 사진들을 전시했다는 내용의 글귀와 함께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로 표현한 다양한 사진들을 크롭해 시계 바늘 모양으로 촘촘히 엮어놓은 포스터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머리도 식힐 겸 한 번 들어 가볼까?’
전시회장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역방향으로 걷다가는 상대방과 어깨를 부딪칠 수 있을 만큼 비좁은 곳에 걸려있는 사진은 이십여 점이었다. 말 그대로 시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찍어 겹쳐놓은 작품부터 시작해 엉켜있던 줄이 점점 풀려지는 모습을 찍은 작품, 대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등 다양한 작품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유독 한 작품에 눈이 갔다.
맞잡고 있는 두 손,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절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 사진 앞에서 멈춰서버렸다. 맞잡은 손이 시간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왜 이 사진을 보니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일까, 대체 이런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끝없는 궁금증의 연속에 나는 누군가가 내 옆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했다.
“마음에 드나요?”
상념을 깬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아, 네. 흥미로운 작품이라 계속 보게 되네요.”
“어떤 점이 흥미롭나요?”
갑작스레 이어가는 남자의 질문에 뭐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감상을 나누고 싶어 말을 건 것일까? 하고는 “음, 일단 시간이라는 주제와 맞잡은 두 손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라는 것이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쉽게 볼 수 있는 맞잡은 손 사진일 뿐인데 왜 눈물이 나려 하는 것일까 하는 점도 그렇고, 그러다보니 대체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졌거든요.” 라 답을 한다.
“그렇군요.”
고개를 까닥이며 남자가 사진을 바라본다. 딱히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 진지하게 답을 한 자신이 민망하게 느껴져 자리를 피하려 할 때였다.
“저 사진의 주인공은 연인이에요. 한 쪽은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쪽은 그와 같은 정도로 아니 그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훨씬 더 깊이 미워하는 사람이었죠.”
갑작스런 남자의 말에 움직이려던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맞잡은 두 손과 시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냐고 물으셨죠? 저 두 사람이 만나서 감정이 깊어져 연인이 된 흐름이 녹아 들어간 시간, 이라 말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저 사진은 두 사람의 청첩장에 넣을 사진 후보군 중 하나였거든요.”
“…그렇다는 말은.”
“네, 저 사진을 찍은 사람이 바로 저에요.”
어색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는 남자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전무한 편인 내 성격상 ‘그렇군요, 작품 잘 봤습니다.’, 하고 돌아서면 되었을 텐데 그 때의 나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해버렸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
분명 차 한 잔을 마시자, 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술집을 향했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날짜가 바뀌어 버렸다. 서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작품의 영감을 얻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식으로 작품이 완성되는지, 사진 현상은 어떻게 하는지 같은 얘기를 주고 받다보니 시간이 흘러버렸다. 얘기를 마치자 밀려오는 피로에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을 홀로 보내는 것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거기다 이야기를 하던 도중 마음에 걸렸던 것이 있어 외따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주소를 물어봐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카게야마 씨, 정신 차리세요.”
“술 안 취했어요.”
“그 대답 아무리 봐도 못 미덥네요. 정신 차리란 말에 술 안 취했다 대답하고 말이죠, 자, 자, 침실까지 들어갈 순 없으니깐 소파에라도, 어서 누워요.”
한 잔만 더 하자며 칭얼거리는 그를 소파 위에 눕혀 놓고는 덮어줄 것을 찾는다. 초가을이라지만 밤에는 쌀쌀한 편이다. 커다란 수건이나 담요 같은 것이 없을까 싶어 두리번거리다 탁자에 놓인 사진들을 보게 된다.
서로를 바라보며 환히 웃는 남녀의 모습. 아까 전시회장에서 본 맞잡은 두 손의 주인공들이 이 사람들이라는 것은 함께 놓인 청첩장 덕분에 쉽게 알 수 있었다. 행복감에 부풀어 있어 그런지 두 사람 다 인상이 좋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 사람, 당신이랑 닮았거든요.’
한 시간 전 술잔을 기울이며 그가 했던 말이 귓가를 울린다. 자신이 들고 있는 사진엔 정말 자신과 닮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통상적인 관념과 달리 자신을 닮은 이는 남자 쪽이었다. 자신은 딱히 타인의 성적 취향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니 뭐라 할 필요가 없다는 쪽에 가깝다면 가까웠다. 그렇지만 자신과 닮은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뭐라 말 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전시회장을 들어서기 전 보다 더 무거워진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빨리 이 곳을 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어 일어설 때 였다.
“츠키시마 씨.”
발음이 새나가지 않고 분명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붙잡힌 손목, 온기가 남아있는 소파에 내동댕이쳐진 몸, 자신만을 바라보는 두 눈.
“당신은 날 떠나지 말아줘요.”
그 말이 족쇄처럼 날 묶어버렸다. 당신만큼은, 제발… 흐느끼는 그의 목소리에 빨려 들어가 점점 다가오는 그를 밀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대체 그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슬프게 울먹이는 것일까. 방금 전까지 여기서 빨리 나가야겠다 생각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툭 밀치면 비켜날 것 같은 그를 오히려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습게도 겹쳐진 입술이 부드럽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서툴게 입술을 여러 번 부딪히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아버린 것에서부터 우리 둘의 관계는 지금과 같아져 버렸다.
그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동정인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온전히 날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했다는 남자를 겹쳐보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날 감싸 안는 그의 온기만큼은 진실이기에, 내 손을 꽉 붙잡는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기에 그의 집착을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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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엔노츠키] 츠키시마 생일 축하글~달이 참 아름답네요
오늘 밤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부모님께서 갑작스레 나가셔야 할 일이 생겨 홀로 가게 마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부모님을 도와 가게 마감을 한 뒤 다락방에 있는 망원경을 꺼내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도 한 몫 했는지 모른다. 거기다 오늘 따라 자신이 만든 크로와상과 딸기 쇼트 케이크만 잘 팔리지 않는 것 역시 지루함을 보태준다. 몇 번이고 시계를 바라보지만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여전히 한 시간 반. 홀로 가게를 지키는 것에 넌더리가 날 때 쯤이었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고 가게 입구를 바라보는데 바람이 심상치가 않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라는 물음의 끝에 혹시라도 지각할까 허겁지겁 된장국을 마시며 들었던 일기예보가 떠오른다. 후텁지근한 더위를 지나 가을의 초엽에 들어섬을 알리는 비가 올 것이라는 게. 그와 동시에 가게 앞 입간판의 상황이 걱정된다. 비만 맞는 거라면 볕이 들 때 자연스레 마를 테니 걱정 없지만 길 건너 가로수 가지들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 어째 불안해 가게 안으로 들여오고 싶어진다.
“들여오는 편이 낫겠지…?”
이마를 긁적이며 가게 문을 미는데 평소보다 힘이 더 들어간다. 문이 이렇게 무거웠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바람이 많이 불어 그런가 보다, 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문을 세게 밀어 연다. 그와 동시에 털썩-하는 소리가 귀에 걸린다. 날 리가 없는 소리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해지다 문 앞을 보자마자 “죄…죄송합니다!” 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짧은 머리칼에 맺힌 빗방울을 떨어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주저앉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던 것이 이 사람과 반대로 문을 밀고 있어서였고, 자신이 문을 엶과 동시에 이 사람이 밀려 넘어졌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때문에 넘어지신 거죠? 라고 묻기엔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게 욕설을 퍼부으며 화를 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자신이 왜 문을 열고 나왔는지 그 이유조차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두려운 기색을 눌러 담으며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하고 연신 사과의 말을 하며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뾰로통한 표정을 봐선 내 말을 무시할 것만 같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붙잡은 채 일어섰다. 앉아있을 땐 그 정도일 줄 몰랐는데 꽤 키가 크다. 그런데 말라도 너무 말랐다. 이래서 밀려 넘어졌구나 하며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근데, 이 남자가 입고 있는 옷 너무 익숙한데…?
“뭘 그렇게 봐요.”
“네?”
“교복 처음 봐요?”
“아…아니, 저기, 그게… 같은 학교…네요?”
“그래서요?”
“아니, 그게…”
반갑다구요- 하는 멍청한 답이 흘러나왔다. 반갑다니 뭐가 반갑다는 거야, 엔노시타 치카라! 대화의 근본을 흔들고 앉아있어, 멍청하게! 라 자책하는데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서 있던 남자가 재채기를 한다.
“일단 들어오세요!”
무작정 남자의 손을 붙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입간판 생각은 까마득히 날려버린 채.
* * *
샌드위치나 조각 케이크를 가볍게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된 테이블이 있어 그 쪽으로 남자를 데려가 앉힌 뒤 수건 하나를 건넨다. 짧은 치마를 입은 손님들이 편하게 앉아 가게의 음료와 빵들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해 둔 덕택이었다.
“레몬그라스 티 괜찮으세요? 아, 추우실테니깐 생강차가 나을까요? 아니면 코코아라던가.”
“저기요.”
“네?”
“괜찮아요. 멍하니 서있다가 넘어진 내 탓도 있으니깐.”
“뭐 때문에 멍하니 서 있던 건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던 남자가 교복 재킷 안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안경 렌즈를 닦는다. 혹시 계속 미간을 찌푸리던 것은 비에 맞아 잘 안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쭈뼛거리며 남자의 주변을 맴도는데 어떤 차를 마시고 싶다는 답이 없다. 전기 포트는 벌써 삑-삑-하고 큰 소리를 내는데. 괜찮다고는 했지만 분명 비를 맞았으니 추울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살짝 짜증 섞인 대답을 했으니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처음 권한 레몬그라스 티와 함께 달콤한 케이크를 내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접시와 찻잔을 준비한다.
어떤 접시를 꺼낼까 하다 흐드러지게 핀 수국이 중앙을 장식한 접시를 꺼내 든다. 속을 도통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남자에게 잘 어울릴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과의 의미라기는 약소하지만 차랑 케이크에요.”
지금까지 됐다고 사양했던 남자기에 다시금 쓴 소리가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정반대의 상황이 자신 앞에 펼쳐진다. 어떤 차를 드시겠냐고 물을 땐 단칼에 거절했으면서 눈 앞에 케이크 접시를 내려놓자 남자의 눈이 빠르게 돌아간다.
“굳이 주신다는 거 말릴 수는 없죠, 뭐.”
겉으로는 틱틱거리며 말하지만 케이크를 향해 뻗는 손길에 생기가 돈다. 입가에 미소도 띠는 것 같아, 뭐지 이 사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하면서도 한 입을 먹은 뒤 찰나였지만 보조개가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이자 조금은 귀엽다는 생각마저 든다.
“몇 학년이에요? 난 2학년인데. 2학년 4반의 엔노시타 치카라라고 해요. 그 쪽은…”
단순히 딱딱한 말투나 키만 보면 상급생일 것 같지만 틱틱거리는 말투라던가 케이크를 먹을 때 자신도 모르게 흘러 넘치는 흥을 보면 하급생일 가능성이 더 크다.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 표정을 보니 자신의 예상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열릴 듯 말 듯 머뭇거리던 입술이 벌어지며 답을 뱉어낸다.
“1학년 4반 츠키시마 케이요.”
역시나. 예상한대로 그는 하급생이었다. 그런데 뭔가 말이 쉽게 놔지지 않아 “그렇군요.” 하고 말하며 그를 바라본다. 쇼트 케이크 위에 장식으로 놔둔 딸기를 입 안에 넣으며 그, 아니 츠키시마가 다시금 입을 연다.
“케이크 맛있네요. 크림을 두텁게 발랐는데도 물리지 않고 오히려 산뜻한 것이… 거기다 딸기가 싱싱하고 맛있네요. 집 근처 베이커리 에서는 크림 자체도 느끼한데다 설탕 물에 잠깐 적셨다 뺀 것 마냥 들큰한 딸기를 얹어서 손이 안 가는데 여기 것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어. 층층이 쌓은 시트지 사이에 넣어둔 딸기 슬라이스도 과하지 않고. 공을 많이 들인 케이크네요.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야.”
다른 것을 물을 땐 관심도 없더니 묻지도 않은 케이크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여하튼 기분까지 좋아졌다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케이크를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다른 케이크들에 비해 딸기 쇼트 케이크만큼은 자신 있게 만들 수 있어 부모님이 마음 놓고 맡기는 품목이기도 했다.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칭찬을 들으니 더 기분이 좋아져 그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잊을 때 쯤이었다.
“아, 아까 뭐 때문에 멍하니 서있었냐고 물었죠?”
어라, 기분이 좋아져도 한참은 좋아진 모양이다. 아까 물었던 질문에 나서서 대답할 정도로.
“달을 보고 싶었어요. 갑자기 빗 속에서도 달이 잘 보일까, 하고 궁금해져서.”
예상치 못 한 답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잘 어울리네요.”
“네?”
“츠키시마(月島) 라면서요. 달을 보고 싶다, 라 생각한 거랑 잘 어울린다구요.”
그렇게 말을 하다 갑자기, 아,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온다. “잠깐만요.” 하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계단을 타고 2층 자신의 방으로 뛰어간다. 며칠 전 현상해뒀던 사진들이 담긴 사진첩을 꺼내 들고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멍한 표정으로 계단을 바라보던 츠키시마가 “무슨 일이에요?” 라 묻는다. 대답 대신 그의 앞으로 다가가 사진첩을 펼친다. 망원경을 통해 눈 앞에 펼쳐진 밤하늘을 찍어뒀던 사진들이 가득하다.
“별 위주로 촬영해서 달 사진은 별로 없지만… 밤하늘 좋아해요?”
자신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찍은 거에요?”라 묻는다.
“네. 취미라서요. 가게 마감을 한 다음에는 망원경을 들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요. 전문가들에 비하면 초보 중의 초보에 불과하지만 혼자 밤하늘을 감상하며 놀기엔 충분해요.” 부끄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자 “부러워요.” 라는 말이 튕겨 나온다.
“나도 밤하늘 보고 싶은데.”
보고 싶은데, 로 끝내면 어쩌자는 거야, 라 타박을 하고 싶지만 제가 먼저 나서서 ‘망원경 좀 써도 될까요?’ 라 물을만한 사람은 아님이 느껴지기에 “그럼 비 안 오고 날씨 좋은 밤에 한 번 놀러 와요.” 라 말한다.
“그래도 돼요?”
“밤하늘 좋아한다면서요. 혼자만 보기 아까웠는데 잘 됐네요. 언제가 좋아요? 대략적인 날짜 말해주면 그 때 시간 비우게요.”
“그럼 달이 예쁜 날에 보는 것이 좋겠네요.”
“달은 항상 예뻐요. 상현달도 하현달도 만월도 다 예쁜걸요.” 하며 그와 눈을 마주치는데 이상하다, 열이라도 나는 것일까? 얼굴이 붉은 것 같다. “혹시 비 맞아서 열 나는 거 아니에요?” 하고 이마에 손등을 갖다 대려는데 “괘…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저 때문에 괜히 일 피해 가는 거 아니에요?”라 묻는다.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뭐, 츠키시마씨, 아니지 츠키시마, 하고 말을 놔도 괜찮으려나요? 하하- 여하튼 작동법 몇 개만 알면 혼자서도 잘 볼 수 있으니깐 일에는 그다지…피해…가…”
자신의 말에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듯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까지 삐죽 내민 그의 얼굴을 보자 대답을 이어가는 것에 주춤하게 된다. 대체 무엇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일까. 방금 전까지 기분 좋게 얘기했는데. 영문을 몰라 우물쭈물하자 답답하다는 듯이 그가 다시금 입을 연다.
“혼자 보게 할 거였어요?”
“네?”
“저 혼자 보게 하려는 거였어요? 만날 날짜까지 잡겠다면서요. 난 그 쪽이랑 함께 달을 보고 싶은데.”
어라,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하고 츠키시마의 말을 곱씹어 보는데 그가 냅킨 하나를 뽑아 신경질적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린다.
“이 날 봐요. 그럼 잘 먹었습니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츠키시마가 가게 문을 밀고 나가버린다. 메일 주소나 휴대 전화 번호도 안 가르쳐주고… 대체 언제 보자고 하는 거야, 하고 냅킨을 돌렸을 때 써있는 것은 세 글자 [내 생일] 이었다.
“…생일…?”
30여분 전 처음 만난 사이니 당연히 그의 생일은 알지 못 한다. 다만 같은 학교, 1학년 4반, 츠키시마 케이 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별 수 없지 뭐.
“아무래도 내일 쇼트 케이크 하나 들고 찾아가야겠네.”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제멋대로인 행동이 밉지가 않고 오히려 신경 쓰인다. 내일 만나면 먼저 물어봐야지. 생일 날엔 어제 먹은 것 보다 더 맛있는 케이크 대령하겠으니 함께 밤하늘을 봐주실 수 있냐고. 그리고 또 하나.
“생일엔 달보다 네가 더 아름답다고 말해줘도 되냐고.”
목 울대를 간질이며 튀어나온 말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처럼 부끄럽긴 하지만 괜찮다.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네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니깐. 영문을 알 수 없이 터져 나오려는 마음을 ‘그래 단지 그 뿐이니깐’, 이라 다독이며 그가 사용한 접시와 찻잔을 치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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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스가츠키] 전력 60분 주제 : 고통 (0) | 2016.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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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오이츠키] 전력 60분 주제 : 손 (0) | 2016.07.10 |
[HQ!! 스가츠키] 전력 60분 주제 : 고통
*언급일 뿐이지만 모브 A씨가 나옵니다. 모브 싫어하시는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평소 말수가 없는 후배가 거하게 취해버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10번 술자리가 있으면 9번은 거절하는 츠키시마 케이가 오늘따라 먼저 나서서 자신도 술자리 가고 싶다 말했을 때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어야 했는데.
“술을 이렇게까지 못 마실 줄은 몰랐는데….”
옆 자리에 앉아있던 다이치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도 그럴 것이 츠키시마에게 맥주 두 잔을 건넨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괜찮아, 자주 안 나왔으니 모를 수도 있지.”
다이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츠키시마 택시 태워주고 돌아올게.”
“내가 나갈게.”
“과대는 앉아 있으세요, 네가 과 행사 자리를 비우면 어쩌자는 거야. 조심히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테니깐 그렇게 미간 찌푸리며 걱정스런 표정 짓지 마. 옆에서 안 말려준 내 잘못도 있으니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인 다이치를 안심시키며 자리에 앉히고는 츠키시마의 옆으로 다가가 자세를 낮춘다.
“츠키시마?”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자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움직이고는 있지만 술에 취한 탓인지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음, 그래… 정말 거하게 취했구나? 저기, 다이치. 츠키시마 팔 좀 어깨에 얹어줄래?”
어깨를 으쓱이며 다이치를 부르자 그가 다가와 츠키시마의 팔을 내 목에 감아준다.
“어이쿠.”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다행히도 다이치가 듣지 못 한 것 같다. 평소 지나칠 때도 키가 크네, 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그를 부축하는 지금 그 사실이 여실히 느껴진다. 15cm 정도의 키 차이가 이 정도로 버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역시 생각과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멋있게 말해놓고 이제 와서 다이치에게 도와 달라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 마신 뒤 술 집 밖으로 빠져 나온다. 술집이 1층이라 다행이었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면 정말…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행히 밖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붙잡아 세웠다. 택시 안으로 츠키시마를 구기듯 넣은 뒤 행선지를 말하려다 그제야 자신이 츠키시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학생 명부라도 찾아보고 나올 것을 그랬나…하며 세상만사 저리 치워놓은 것 마냥 잠에 빠진 츠키시마를 흔들며 이름을 부른다.
“츠키시마.”
“…으응?”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하고 목소리도 차분한 예의바른 친구, 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그가 살짝 콧소리가 들어간 반응을 보인 것이 신기했다. 그래,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전까진 알지 못 했던 그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알아가는 것이 순수한 의미로 놀라웠지만 그건 그거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었다.
빨리 행선지를 말하지 않으면 손님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 버리고 가버리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택시 운전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츠키시마에게 “집 주소, 빨리 집 주소 불러줘.” 라 애원하듯 묻는데 왜 그런 것을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자신을 바라본다.
“XX동 OO빌라, 알잖아…”
그 주소를 들은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고 귓가가 윙-하고 울리는 것만 같다. 츠키시마가 내뱉은 빌라의 이름과 호수는 어디선가 들어봤던 주소, 아니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몇 번 가봤던 한 학번 후배인 A의 원룸 주소였다.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함께 사는 애인이 있지만 형들한테 보여 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내 부탁은 뭐든 들어주는 착한 애이긴 하다고 어깨를 으쓱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원 나잇을 해도 자신을 너무 좋아해 차마 뭐라 말하지도 못 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편한 애라 여전히 사귄다.’ 말을 들었을 때 이 녀석과 인연을 끊어야겠단 생각을 했고 그 날 이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사이가 틀어진 A의 집 주소를 왜, 다른 누구도 아닌 츠키시마가 내뱉은 것일까.
“저기요, 안 가실 거면 내리세요.”
슬슬 짜증이 나는지 말투가 차가워진 택시 기사에게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인 뒤 근처에 있는 자신의 원룸으로 츠키시마를 데리고 올라간다. 침대 위에 츠키시마를 내려놓고는 냉장고로 다가가 미네랄워터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킨다. 행실이 좋지 않았던 A와 성실함의 대명사 츠키시마 간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내 목을 타게 만드는 것인지, 어째서 잊고 있던 A의 집 주소를 츠키시마의 입을 통해 듣자마자 떠올린 것인지, 왜 이 상황에서 자신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인지 이유도 알지 못 한 채 츠키시마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다이치가 기다리는 술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꽤 술을 많이 마셨던 것도 같다. 아니, 많이 마신 것이 틀림없다. 어지간하면 취하지 않고 필름 끊길 일이 없는 자신이 어떻게 집까지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으니깐. 거기다 머리까지 아프다. 숙취 같은 건 없는 편인데 왜 이렇게 머리가 깨지도록 아픈 거지? 아, 일단 다이치한테 전화해서 내가 실수한 것은 없나 물어봐야겠다. 하며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괜찮으세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누구세요?” 라 묻다가 어젯밤 츠키시마를 자신의 방에 데려다 놨던 사실이 떠올라 “츠키시마?”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네, 어젠 감사했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컵을 들이미는 그를 빤히 바라보자 “꿀물이에요. 이상한 것 아니니깐 마셔도 괜찮아요.” 하고 그가 뚱한 표정을 짓는다.
“이…이상한 거라고 말한 적 없어.”
“장난이에요, 머리 아프시죠? 거의 아침이 다 돼서 들어오셨던데 얼마나 마신 거 에요?”
자연스레 넘어간 핀잔에 내가 츠키시마의 집에 얹혀 사는데 민폐를 끼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여기 내 원룸이거든?” 하고 맞받아치자 “맞아요,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 정도로 몸에 무리가게 술 마시는 거 아니에요.” 라는 대답이 튀어 나온다.
“그러는 너도 어제 술 많이 마시고서는….”
“전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담담한 듯 하지만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말투에 츠키시마를 빤히 바라본다. 무슨 뜻이냐는 자신의 눈빛을 알아챈 것일까 츠키시마가 다시금 입을 연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에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어제 눈치 채지 않았나요? 제가 불렀던 집 주소, 어디선가 들어봤던 곳이었잖아요.”
그 말에 할 말을 잃는다. 무의식중에 츠키시마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주소, 그래, 그 주소를 듣고 여러 생각을 하다가 다시 술자리로 나갔고… 술을 많이 마셨었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많이 취했으면서 그건 기억해?” 라 묻는다.
“기억해요. 물론 그 당시 상황들이 대강만 기억나지만… 스가와라 선배 표정에 내려앉은 당혹감이 술을 확 깨게 만들더라구요.”
“…내 표정?”
“선배는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전 한 번에 느꼈었거든요. 말없이 다니는 저한테도 늘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을 걸어주는 선배에게서 그런 표정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었으니깐.”
내가 그렇게나 당황한 티를 냈었던가? 하긴 A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다보니 괜히 생각이 많아져서… 묻지도 않은 말에 대한 대답들이 부유한다. 그 와중에 츠키시마의 말을 다시금 곱씹는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에요.’ 라는 말을.
내 예상이 맞다면 츠키시마가 말하는 누군가는 A일 것이고 A가 애정 없이 가둬뒀던 애인은 츠키시마일 것이다.
“굳이 그렇게 신경 안 써줘도 괜찮은데. 왜 집 주소가 A와 같냐고, 어느 술자리나 다 참석하는 A가 안 나왔는데 왜 네가 나왔냐 물어도 전 상관없어요. 아마 스가와라 선배가 상상한 답이 제 현실이 맞을테니깐요.”
너무나도 담담한 츠키시마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왜 하필 그런 놈이랑 사귀는 것이냐고, 나라면 절대 안 사귄다고 미쳤냐고 멱살을 잡으며 흔들고 싶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그렇지만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었어요. 이 답답한 마음을, 일방적인 사랑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것이 맞냐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어요. 그 대상이 누가될지는 몰랐지만… 스가와라 선배라서 다행이에요.”
무슨 말이든 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에 “왜…” 하고 목울대를 튕기며 소리가 새어나온다.
“네?”
“왜 하필 A였어?”
제일 신경 쓰였던, 어쩌면 몇 시간 째 내 기분을 쳐지게 만든 장본인에 대한 질문을 해본다. 그 말에 츠키시마가 잠깐 입술을 깨물며 말을 고르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 펼치는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어떤 답이 나올지 몰라 그의 입술만 빤히 쳐다보기를 십여 분, 뭐라 말할지 정한 것인지 그가 입술을 떼어낸다.
“…모르겠어요. 그냥 처음엔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내게 관심 갖고 잘 대해준 것이 고마워서 시작한 관계였는데 이젠 모르겠어… 선배, 난 그렇게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않는데, 그저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반 아니 1% 만이라도 받고 싶은 것뿐인데 내가 이기적인 걸까요? 원래 이렇게 사랑이 힘든 건가요?”
이제껏 본 적 없는 괴로운 표정의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아려오고 A에 대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왜 자신이 어젯밤 츠키시마의 입에서 A의 원룸 주소를 들은 뒤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어째서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던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이기적이지 않아. 그리고 이기적이어도 상관없어. 내가 준만큼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뭐가 나빠. 넌 잘못한 것이 없어. 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을 뿐이야.”
만약 나였다면 네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게 해줬을 텐데, 네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줬을 텐데, 하고 순서를 무시한 채 밀려 올라오려는 말들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따뜻한 조언을 해 주는 선배인 것 마냥 츠키시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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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오이츠키] 7월 20일 오이카와 생일 기념 글
무더운 여름 날씨는 딱 질색이다.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싫어 집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고 싶다. 하지만 그 마저도 무리인 것이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 바람조차 싫어하는 자신의 예민함 탓에 방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만히 있어도 내리쬐는 햇볕에 방 안이 달궈지면서 자연스레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의 느낌 역시 싫기 때문이다. 그나마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땀을 살짝 식혀줄 정도의, 바람결에 실려 오는 얕은 공기의 흐름 정도다. 그런 자신이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향한다는 것은 꽤 큰 결심을 했다는 말과 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짜증날 정도의 날씨에 밖을 나가야 하는 것, 호불호가 정확히 갈려있는 두 일을 저울질 해 전자를 택한 자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밖으로 향했다.
“더워…”
밖에 나옴과 동시에 자신의 입을 뚫고 나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덥다는 말이었다. 다행히도 자신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왔고 상대방은 자신보다 먼저 나와 있었기에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멍청히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더운 것이 질색이고 그 상황에서 짜증나는 일이 발생하면 쉽게 토라져버리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아는 상대방, 오이카와 토오루는 인공 폭포가 있는 공원으로 자신을 이끌었다.
“여기가 그나마 덜 덥지?”
“…네. 쏟아져 내리는 물 덕분에 좀 시원하네요.”
오이카와 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그가 미소를 짓는다.
“츠키시마는 여름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지?”
“네. 오이카와 씨는 좋아하나요?”
“어…응. 싫을 필요까진 없잖아, 날도 날이고.”
날도 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 폭포 쪽으로 더 다가가 팔을 뻗어본다. 돌에 맞고 잘게 부서져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뻗은 손 위로 떨어져 내린다.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지만 ‘여름’ 이라는 주제를 생각해보니 기분이 언짢아진다.
“여름이 뭐가 좋아요? 덥기만 하고 해는 뜨겁고 숨은 턱 막히고. 좋은 게 하나도 없어.”
단호한 자신의 말에 오이카와 씨가 주춤하며 “…진심이야?” 하고 묻는다. 진심이냐니 대체 뭐가?
“…진심이죠, 왜요?” 라 대답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이 새어나온다.
“좋은 것이 하나 있었네요.”
잊은 것은 아니었는데.
“토오루-”
지금까지 늘 오이카와 씨, 하고 부르다 토오루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두 살 연상, 사귀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아직은 손을 맞잡는 것조차 어색해하는, 말 그대로 시작 단계의 두 사람.
“반말하려 한 것은 아니었어요. 미안. 근데 갑자기 생각났어. 여름이 좋은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당신의 생일이 있기 때문일 거 에요.”
잊고 있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여름이란 것에 집중하다 보니 말이 안 튀어 나온 거였어요, 하고 말을 이어가는데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온 그가 날 끌어안고 등을 쓸어 내려준다.
“고마워.”
“네?”
“싫어하는 계절이잖아. 그런데도 내 생일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 라 말해주는 것이 날 얼마나 떨리게 하는지 넌 모르지?”
조금은 들뜬 듯한 목소리.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던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날 껴안은 그의 등에 팔을 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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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쿠로츠키] Vanishing Love #2 (0) | 2016.05.26 |
[HQ!! 오이츠키] 전력 60분 주제 : 손
금요일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집에 가자마자 쉬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방을 쌀 때 였다. 교실 안이 소란스러워 진 것을 보면 오늘 역시 그 사람이 온 것이 틀림없다.
“응, 그래 안녕. 우와 이거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굳이 안 줘도 되는데, 어쨌거나 고마워.”
살랑살랑 부드럽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하루도 빠짐없이 겪는 이 상황에 대한 대처는 단 한 가지다.
“케이쨩!”
친근하게 자신을 부르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죄송하지만 오늘도 대답은 노에요.” 라 말하며 가방의 지퍼를 쭉 올린다.
“우와, 차가워. 어쩜 우리 후배님은 단칼에 내 말을 거절할 수가 있지?”
실망했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이며 내 책상에 두 손과 얼굴을 올린 사람은 동아리 선배인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사거리에 있는 케이크 집 같이 놀러가자. 이번 주부터 일주일 간 몽블랑-아메리카노 세트 구매하면 졸인 밤 슬라이스가 들어간 쿠키 한 봉지씩 준댔단 말이야.”
“낯 간지럽게 남자 둘이 뭐 하자는 거예요.”
“달콤한 것 좋아하잖아. 혼자 가는 것 보다는 같이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아? 그리고 공룡도 좋아하잖아. 케이크 집 옆에 귀여운 인형 가게가 생겼대. 사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레 내 손등 위에 손을 올려놓는 그의 돌발 행동에 나도 모르게 당황한다. 그러나 놀라지 않은 척 그의 손을 밀치며 차갑게 쏘아 붙인다.
“그런 말은 여자 친구한테나 하세요.”
“여자 친구?”
“네. 여자 친구 있으시잖아요. 전교에 소문이 파다해요. 아가씨 학교로 유명한 T 여고 전교 부회장이랑 사귄다고.”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는 내 여자 친구라니. 거기다 T 여고 교문 앞도 가 본 적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어디서 잘못된 정보는 듣고 와서 심술부리고 그래.”
비식 입술을 밀어 올리며 웃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빛이 난다. 자신도 모르게 탁 하고 목에 걸린 숨을 밀어 삼키며 그의 말을 재빠르게 곱씹는다. 여자 친구가 없다, 모르는 일이다, 전혀 신경 쓰지 말라, 는 그의 자기변명. 그런 소문이 돌게 만든 당신의 잘남 자체가 죄악이라구요, 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뒤엉켰지만 난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동아리 후배, 그 자체니깐.
“모르면 가서 보고 사귀고 오시던가요. 예쁘고 착하다던데, 오이카와 선배 예쁘고 착한 여자가 취향 아니었어요?”
“케이쨩 앞에서 내 이상형에 대해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 안 해도 알아요. 그 정도는.”
그 정도는 안다, 라 말하면서 이상하게 기분이 확 상해버린다. 어째서일까, 왜 기분이 나쁜지도 모르겠는 채로 일단 가방을 메고 본다.
“집에 가는 거야?”
“네, 가야죠.”
“그래? 그럼 같이 나가자.”
나와 함께 하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그가 달라붙는다. 이미 익숙한 일이라 그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함께 교문을 통과한다.
“정말 안 갈 거야?”
“어디를요.”
“케이크 집.”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볼에 공기를 불어 넣은 모습이 마치 투정 부리는 미운 네 살만 같다. 어쩌면 이렇게 애 같은 행동만 골라 하는지, 오늘도 난 그의 이런 모습에 져버린다.
“…졌어요.”
“어?”
“알았어요, 케이크 집 함께 가자구요.”
* * *
몇 번 와봤던 케이크 집이지만 몽블랑을 주력 상품으로 미는 가을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워낙 딸기 쇼트케이크를 좋아하다보니 딸기 위주의 케이크만 먹은 것도 한 몫 했지만.
“내가 억지로 데려왔으니깐 돈은 내가 낼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톡 쏘아 붙이는 자신의 말에도 사람 좋게 웃으며 지폐를 내미는 그의 모습에 조금은 화가 난다. 제멋대로로 행동하는 내게 화라도 내줬으면 좋겠는데, 늘 이런 식으로 나가니깐 당신한테 막 대하게 되잖아.
“먼저 가서 앉아 있을래?”
“알았어요.”
자리에 앉아 쉬는 시간에 읽다 만 소설을 꺼내든다. 세 번이나 읽은 책이지만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져 들고 온 책의 주인공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이 다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 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충분히 뒷내용이 예상 가능할 정도로 단순한 스토리였지만 심리 묘사가 탁월해 가끔 생각이 나는 책이기도 했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빠져 있다가 목이 말라 책에서 눈을 떼었을 때 눈에 들어 온 것은 한 입도 먹지 않은 몽블랑 세트와 테이블에 팔을 올려 놓은 뒤 자기 팔을 베고 잠이 든 오이카와 선배의 모습이었다.
“오이카와 선배?”
시계를 보니 가게 안에 들어온 지 20분 정도 지나있었다. 아메리카노 잔 안의 얼음이 조금 녹아 있는 것을 보아하니 주문한 음료와 케이크를 받아들고 자리에 오긴 했는데 내가 독서에 빠져 있어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앉아 있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만 책 보고 같이 먹자 말하면 될 걸. 바보 아녜요?”
볼을 쿡 찌르며 말하는데도 대답이 없다. 꽤나 푹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내게 뻗어진 그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옮긴다. 늘 위협적인 서브를 가하는 것과는 달리 예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그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본다.
[좋아해요.]
절대로 입 밖에 내뱉지 않을 말을 적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이카와 선배, 일어나요.” 하며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든다. 우웅, 조금만 더 잘래… 하고 칭얼거리는 그의 이마를 탁 치면서 “잠꾸러기 씨 빨리 일어나세요. 안 일어나면 나 혼자 다 먹을 테니깐.” 하고 협박 같지 않은 협박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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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조금 시큰거리는 오른 손목을 주물거리며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해 “이와쨩, 나 아이스 사 줘!” 하며 다가갔다가 “오늘은 니가 좀 사!” 하고 성질 내는 이와쨩과 함께 편의점에 들렀던 것도, 뭘 먹을까 하고 고민하다 시원한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꺼내든 것도,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밀어 넣은 것도 자주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날과 달랐던 것은 꽤 심각한 표정으로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한 남자의 등장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내 왼손이 뭔가에 낚여 채진다. 당황한 나머지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릴 뻔 했지만 다행히도 쭈쭈바 형태인데다 오른손으로 야무지게 쥐고 있어서 떨어뜨리진 않았다. 그러나 ‘큰일 날 뻔 했네.’ 하고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것도 잠시.
“오이카와 토오루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내 손을 낚아챈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높이가 맞았지만 어깨와 허리를 살짝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는 것을 봐선 그의 키는 자신보다 좀 더 큰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나 큰 사람이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이름을 부른 상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의문을 품으며 그의 눈을 바라볼 때였다.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갑작스런 그의 말에 옆에 함께 멈춰서 있던 이와쨩이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와쨩보다 더 놀란 사람은 나였다. 지금까지 내게 좋아한다 말을 했던 사람이 한 둘도 아니었고, 당연히 이런 갑작스런 고백 역시 여러 번 받아봤다. 다만 지금 같이 남자에게 고백을 받은 것은 맹세컨대 처음이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저…저기요, 무슨 말씀이신지…” 라 말해보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려요?”
“아…아니, 그…그러니깐 저기, 그러니깐…”
살면서 이렇게 당혹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지금껏 어떤 상황에서도 나불나불대던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뭐라 말을 해야 서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은 채 헤어질 수 있을까. 아니 이미 기분이 상하지 않는단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 이와쨩이 “그럼 천천히 얘기하고 와, 난 먼저 갈게.” 하고 어색하게 대사를 치는 것이다. 야, 넌 이 와중에 친구를 두고 도망치냐? 하며 쏘아보지만 내 마음 속 외침은 무시한 채 이와쨩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 내가 아이스크림까지 사 줬는데! 물론 네가 떨어뜨리긴 했지만 먹긴 먹었잖아! 그 값은 해 줘야지!!!!! 하며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을 때였다.
“대답은 안 해주시나요?”
그 말에 이와쨩을 향했던 눈을 돌려 손 깍지를 끼고서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매우 고지식해 보이는 얼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내게 계속 답을 물을 것만 같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결국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을 떼어내 “저기, 음, 그래, 미안해요, 고백…은 고맙지만 거절할게요.” 라 말한다.
자신의 대답에 그가 입술을 오물거린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지간하면 그냥 돌아서겠지만 날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신경이 쓰여 두고 갈 수가 없다. 잠깐만… 기다려볼까? 하고 부동 자세로 멈춰있지만 아무래도 긴장을 한 탓인지 입술이 바짝 타오른다. 고백을 한 입장이 아니라 고백을 받은 입장인데 왜 내가 더 긴장을 해야 하는지, 대체 왜 이렇게 멍하니 서 있어야 하는지 조금 답답한 감정을 느끼며 쭈쭈바를 입가에 갖다 대었다. 끈적하지만 여전히 시원한 아이스크림 덕택에 메말랐던 입술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만 같다. 한 번 달콤함이 밀려 들어오자 멍해졌던 기분이 나아진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간헐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다 피는 것 이외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며 다시금 아이스크림을 빨아 올릴 때 였다.
“그러면 당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
“…네?”
“포기를 하더라도 왜 포기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일단 그 쪽도 남자고 저도 남자인 건 아시죠?”
“네.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왜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는 그를 보며 하- 하고 한숨이 새어 나온다. 처음 본 사람, 그것도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고백을 받아 안 된다 거절했는데 그게 왜요? 라는 말을 듣는다 라니 이건 뭔 듣도 보도 못 한 신세계인지...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성별이 그렇게나 중요한가요?”
“…안 중요한 것은 아니죠. 일반적으로 다들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지 동성 간 연애를 하진 않잖아요.”
“일반적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세운 기준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전 보편적인 것을 따르며 살고 싶어요. 그 쪽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이름은 츠키시마 케이, 오이카와씨보다 2살 어려요. 고교 시절까지는 배구를 했었지만 지금은 하지 않고 있어요. 포지션은 미들 블로커였고요. 또 뭘 말하면 될까요?”
짤막한 자기 소개를 끝내고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보며 다시금 할 말을 잃는다. 어떤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을 것만 같은 그에게 “포기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면 되는 건가요?” 하고 다급하게 외친다.
“…납득이 갈만한 그런 이유들이라면요.”
선뜻 답하는 그의 말에 조금은 놀란다. 방금 전까지의 반응을 봤을 땐 그래도 싫다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그 쪽, 아 츠키시마씨? 라고 했죠? 츠키시마씨가 좋아하는 것들을 우선 알려주세요.”
“…그건 왜요?”
“그 쪽이랑 제 취향이 정반대면 함께 있어봤자 즐겁지 않을테니깐요. 그게 당신이 날 포기할 수 있는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 말에 그가 턱을 쓸어 내리며 날 바라본다. 뚫어지게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뻔도 했지만 안 그런 척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린다.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면 일단 몇 번 만나야 할 것 같네요. 어때요, 오이카와씨. 지금 저랑 함께 식사부터 할까요?”
너무나도 자연스레 내 팔을 잡아 끄는 그의 행동에 지금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발걸음을 떼다…어라…? 이게 아닌데? 하고 현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내 팔을 붙잡은 그의 악력이 생각보다 세서 벗어날 수가 없다. 꼼짝없이 끌려가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할 판국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쪽 생각보다 약았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칭찬 아니에요.”
“칭찬으로 받아들일 거에요.”
너무나도 당당한 그의 말투에 입술을 비죽이는 것 외에는 저항할 방도가 없다. 뭔가 분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것 비싼 밥이나 뜯어먹어야지, 하며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끄는대로 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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