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많이 추워졌다. 아직 가을인데 벌써 겨울이 다가온 것 마냥 살갗을 에는 추위가 날 감싼다. 어쩌면 이 추위는 외로움과 분노에서 발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지금의 자신은 그 누구보다 외로이 괴로운 상황을 버텨야 하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침상에 눕고 싶지는 않았지만 온 몸이 피로한 탓인지 잠시라도 몸을 뉘이고 싶었다. 얇은 이불 한 장을 덮고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려본다.

 

자신의 이름은 츠키시마 케이. 평범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좋아하는 서책에 파묻혀 하루 하루를 지내던 이였다. 여섯 살 터울의 형님과 친우처럼 지내고 어딜 가도 형님의 손을 꼭 붙잡고 다니던, 달콤한 것을 좋아해 장이 서거나 축제가 열릴 때 마다 형님을 졸라 달콤한 과자를 얻어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자신의 부탁은 언제나 형님이 들어주었다. 물론 형님이 들어줄 수 없는 일을 부탁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가며 어리광을 부렸기에 형님의 울타리 내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어린 아이가 되어도 상관 없었다. 장남이 아니기에 굳이 관직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관직에 나가더라도 차남이기에 굳이 위를 향해 걸어나갈 필요가 없이 적당히 삶을 살아나가면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적당한 삶, 가문의 차만 심하지 않다면 마음에 드는 규수가 생겼을 때 혼례를 치를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었는데 불과 두 달 전 일이 틀어져 버렸다.

 

 

 

=

그 날은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었다. 누군가 높으신 분이 온다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자신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형님과 함께 밖에 나가 축제를 구경할 수 있단 것이었다.

2년 전 관직에 발을 들인 형님은 반년 전부터 유독 바빠져 자신과 얼굴을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축제가 있는 주에는 그 주를 완전히 쉴 수 있게 해 줘 축제 때는 온전히 일주일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축제 주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냐 물었을 때 형님은 그 분께서 특별히 하사하시는 보물 같은 하루들이지. 라는 질문에 살짝 빗겨난 애매한 답을 했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형님의 입으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왕위 계승에서 살짝 빗겨난 태자 중 한 명이라는 것으로 알고는 있다. 답을 피하는 형님에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지난 번에 먹지 못 했던 과자를 먹어 봐야지- 안에 달콤한 팥 앙금과 졸인 밤이 들어있다는 것이 참 맛있어 보이던데, 하면서 즐겁게 옷을 꺼내 입고 형님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붙잡은 형님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마음이 편해지는 그 느낌이 좋아 조금 더 세게 형님의 손을 붙잡아 본다.

 

오늘은 인파가 심하니 손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집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형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 아이가 아니니깐요.

집까지 갈 수 있다 해도 걱정이 되니 하는 말이다.

 

굳은 표정으로 핀잔을 주는 형님의 말에 이렇게 손을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형님을 잃어버리겠어요. 걱정은 하지 마시고 앞을 잘 주시해서 걸으시지요, 잘못하다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실 수도 있으니깐요. 하고 농을 치며 웃자 형님의 표정이 탁 풀리면서 다른 이들과 의견을 나눌 땐 어떻게든 내 의견을 관철해 나가는 나인데, 이상하게도 네 말에는 못 이기겠단 말이지. 하고는 내 이마를 툭 친다. - 하고 토라진 표정을 짓는 자신에게 귀애한다는 행동에 그리 성을 내는 것이냐. 내 이러니 너를 아직도 여섯 살 꼬마 아이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냐. 하며 웃는다. 괜히 그 웃음에 낯이 간지러워져 매번 가는 주전부리 가게에 먼저 뛰어가 있을 테니 값을 치르러 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형님? 하며 손을 놓는다. 천천히 가거라, 잘못하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하느냐- 그 쪽은 사람이 많으니 돌아서 가자꾸나- 하는 형님의 말에도 늘 가던 길 쪽으로 발걸음을 빨리 하던 때였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함께 인파에 밀려 들어간다. , 그러고 보니 그 높으신 분이 이 길로도 지나간다 했었지? 하필 그 시간에 내가 끼어들었구나 하면서 최대한 바깥 쪽으로 몸을 빼낸다. 어떻게든 높으신 분의 행차 길을 보겠다며 길 안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과 정 반대로 움직이려니 힘겨웠지만 옷 매무새가 좀 흐트러진 것을 제외하면 별 다른 문제가 없이 빠져 나왔다. 이제 모퉁이의 저 집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 삼십 걸음만 하면 늘 가던 주전부리 가게가 나올 테니 거기 가서 쉬어야지 하고 빠르게 모퉁이를 돌 때였다. 무언가와 부딪혔단 자각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든 생각은 나이가 몇인데 넘어져 옷을 버렸다 말할 것인가…’ 하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함께 넘어진 이는 괜찮은지 살피려 고개를 들려 할 때 괜찮으십니까? 라는 물음을 먼저 들었다.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는지요, 의복도 새로 꺼내 입으신 것 같은데 저 때문에 버리신 것은 아닌지…”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았다. 당황한 기색은 엿보였으나 침착한 그 목소리에 오히려 자신이 잘못한 느낌이 들어 , 아닙니다, 저야말로 급히 길을 걷다 이런 것이니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라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는 꽤나 고운 옷을 입고 있었다. 곱다는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남색의 옷에 그보다는 연한 실로 소매 끝 부분에 자수를 넣은 것이 곱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상대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단 사실에 눈을 마주친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목소리만 들었을 땐 예의 바르고 침착할 거라 여겼는데 지금의 눈빛은 그 범주와는 다르다. 격정적, 이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몸이 그 쪽으로 쏠린다. 아니, 그에게 안기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드디어 찾았다.

 

찾았다니, 무엇을? 대체 왜 처음 보는 사내가 날 안고 기쁘다는 듯 저리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형의 표정은 왜 그리 어두운 것이었던 걸까, 그 당시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설마 그 사람이 형이 모시고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이 나라의 3 태자이며, 그 사람이 내게 집착하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딘지 모르게 적막했다. 입술을 꽉 깨무는 형님의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물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라도 말을 걸었다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눈물이 터져나올 것처럼 보여서 단지 조용히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케이.

 

형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형님은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다정한 눈빛, 따스한 손을 자신에게 내밀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대신했던 분이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네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아깝다 말하던, 조금은 유난스러운 형님이었는데 그런 형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단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답을 할 때를 놓쳐버렸다.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오늘의 일이.

 

갑작스런 형님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하며 신경을 곤두세워본다.

 

“너도 알다시피 반 년 전부터 나는 꽤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단다. 그게 다 관직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네가 뵈었던 그 분, 3 태자의 스승이 되었기에 그런 것이었단다. 네게는 미안했지만 늘 홀로 있는 그 분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쉽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단다. 처음엔 너와 비슷한 나이라 더 관심이 갔던 것일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볼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컸었지. 왕위에 직결되지는 않았지만 직결될 수도 있는 자리,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자리,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자리, 그것이 태자의 자리라는 것을 지난 2년 간 뼈저리게 느꼈었기에. 그런 그 분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천천히 그 분께 다가갔고 반년 동안은 가끔씩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 사이가 되기도 했단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그 분은 경계심이 많으셔서 몇 년을 옆에서 수발 든 시종들도 잘 믿지 않는다시더군. 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그리 호의적인가 이유를 몰랐었지.

 

거기까지 얘기한 형님은 잠시 말을 멈추시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 새 공기가 차가워지고 하늘빛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 분께서는 가끔 옛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 할 정도로 어렸던 시절, 호위와 시녀들의 눈을 피해 궁 밖으로 몰래 나왔다가 만나게 되었던 얘기라던가.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 하였지만 그 때 만나게 된 이를 그리워하는 듯 하였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던 형님의 눈이 나에게로 내려 앉았다. 따뜻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그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형님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분의 곁에 네가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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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온 몸이 떨릴 정도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 일까. 내게서 평범한 삶을 앗아간 이의 옆에서 반려 라는 명목 하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사실이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어째서 형님은 내 손을 순순히 놓은 것 일까. 누구보다 날 아낀다 말하던 그 입술로, 늘 내 행복을 바란다던 그 입술로 어찌 태자님께 케이를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라 말한 것 일까.

원망스럽다, 너무나도 원망스러운데 그럴 수 없다. 내 손을 끌어당겨 잠시 깍지를 꼈던 형님의 손이 떨렸던 것이, 내 얼굴을 쓸어 내리며 행복해야 한다. 라 말했던 것이, 내 손에 늘 형님이 지니고 다니던 옥패를 쥐어줬던 것이, 그 모든 기억들이 내게서 형님을 미워하지 말라 외치는 것만 같아서 차마 미워할 수 없다. 내게서 다정한 형님의 기억을 앗아갈 수는 없다. 내게서 그런 형님에 대한 애착을 무너뜨릴 수 없다. 뭔가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완고하고 명석하며 가족애가 넘치는 형님이 이토록 쉽게 날 내어준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 없으니깐.

하지만 는 미워할 것이다. 평생 미워하고 미워하며 미워할 것이다. 미움이 가득 차 흘러내리면 그 때는 날 놓아주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몸을 웅크린다.

 

츠키시마.

 

상념을 깬 것은 지금까지 떠올리던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인 오이카와 토오루의 목소리였다.

 

먼저 자도 된다 말했거늘, 혹여 잠자리가 불편하여 잠에 들지 못 한 것 인가. 사흘 뒤 아키테루 공이 입궐할 때 그대가 사가에서 쓰던 침구를 가져와 달라 하겠네.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어찌 그리 쉽게 형님의 이름을 부르실 수가 있습니까, 지난 반 년간 제게서 형님을 빼앗아 가시고 끝내는 형님과 제 사이를 갈라 놓으시고선 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당신은 잔인하시군요. 제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는 제 옆에 당신만 남아 있다니 이 무슨 불공평한 처사입니까. 당신이 제 1 태자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 입니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말들이 마구 엉켜 들어간다. 다만 그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 한 채 구부린 몸을 더 둥글게 말아 웅크린다.

 

대답 대신 건드리지 말라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 말에 입술을 깨문다. 어차피 그리 말해봐야 그 쪽이 날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다. 그 쪽이 나보고 살라 하면 사는 것이고 죽으라 하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라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데 한숨 소리가 들린다.

 

걱정은 말게나. 예전부터 그대가 말하지 않았는가,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다만,

 

다만, 하면서 다가오는 소리에 두 눈을 꽉 감아 버린다. 처음부터 날 바라보던 눈빛이 싫었다. 마치 날 집어 삼킬 듯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눈빛,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뜨거운 눈빛이 날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 눈빛이 생생해 두려울 정도다.

 

그 쪽은 열기가 잘 가지 않으니 내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달래는 듯한 말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 질릴 때까지 침묵하고 기다릴 뿐.

 

하여간 그 고집은 변치 않는구나.

 

변치 않는다, 라는 말에 대체 무엇이? 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던 그 날도 드디어 찾았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 사람과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려고 할 때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자신의 몸 위를 덮는다.

 

이 쪽으로 오는 것이 싫다면 하다못해 이불이라도 잘 덮거라.

 

평소 성격 같았으면 이불도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침상 근처의 거울에 비친 그의 표정이 왜 그리 서글퍼 보이는지, 이마저 거절했다간 상처 받을 것만 같아 그저 덮어준 이불을 푹 들쓸 뿐이었다.

 

 

 

=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 원래 제 잠자리가 아니고서는 익숙지 않아 잠을 잘 이루지 못 하는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오늘 같이 잠자리도 바뀌고 마음이 불편한 날 이렇게 편히 잠이 든 것일까. 안 꾸던 꿈까지 꾸고.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함부로 건드리는 것 아냐. 라 단호하게 말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향한 곳은 어떤 남자 아이였다. 꽃을 꺾은 손을 뒤로 감추고 있는 듯한 품으로 보아하니 몰래 꽃을 꺾은 아이에게 자신이 훈계를 내리는 중인 듯 하다. 그 아이가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기억이나지 않는다?

 

그래, 꽃이 예쁘지. 하지만 마음대로 건드리거나 꺾어선 안 돼. 이렇게 꺾어버리면 처음 볼 땐 예쁘지만 시들어 버릴 거야. 시들면 넌 버릴 거잖아. 너야 꽃을 보고 좋아했으니 목적을 이뤘다지만 저 꽃은 뭐가 되는 거지? 예쁘게 피어났지만 제 명대로 살지 못 하고 네 손에 꺾여 그대로 끝이 나버렸잖아.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훈계를 하는 품이 자신답다. 제법 조리 있게 말하고 있는걸, 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꽃을 꺾은 아이가 무언가 말을 한 듯 하다, 그 말에 어린 자신이 고민을 하다 말을 꺼낸다.

 

어쩔 수 없지. 이미 꺾어버린 것은. 그렇지만 네가 이 꽃에게 미안하단 마음이 그렇게 크다면 , 맞다, 전에 어머님과 사촌 누이께서 이 꽃으로 예쁘게 손톱을 물들이는 것을 보았었어.

 

그 말에 꽃을 꺾은 아이가 자신도 손톱을 물들이고 싶다 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 라 말하고는 어머님께 가서 두 아이 모두 손을 맡기지는 않았을테니.

 

지금은 불편하지만 하룻밤 꽁꽁 싸매고 잠이 든 뒤 풀면 예쁘게 물들 거야. , 나도 이렇게 했으니깐 우리는 하나야.

 

어째서인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봉숭아 물을 들이고 환히 웃는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과 함께 손을 물들인 자신 또래의 남자 아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립다. 이제껏 이런 꿈도, 이런 기억도 없었는데.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 딱딱한 경어도 쓰지 않고, 또래에게 쉽게 말을 걸고, 함께 웃고 떠드는 이 따뜻한 기억에서 깨어나오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눈이 떠진다. 마치 그 꿈이 현실인 것 마냥 생생해 손 끝을 바라보지만 봉숭아 물을 들인 흔적이 없다.

 

무엇을 그리 보느냐.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옆을 바라본다.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내 시선을 따라 손 끝을 한 번 바라본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말을 꺼낸다.

 

손 끝이 허전한 것이냐.

답을 드려야 하는 문제입니까.

 

자신의 말에 그가 놀란 듯 했다. 그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면.

 

어떤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꾸라도 해주니 마음이 그나마 나아지는구나.

그 쪽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그 쪽의 거듭되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번거로울 것 같아 말한 것이니.

이유야 어찌되었건 말을 해줬다는 그 자체가 나는 행복한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헤실헤실 웃는 그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왕권이 어찌되고 왕위 계승이 어찌되고의 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12명의 태자들 중 손에 꼽히게 출중한 재능을 가진 황자가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3 태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깐. 그런 사람이 이렇게 느슨한 모습을 보인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웃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명령을 하는 것인가?

왕위 계승 1순위는 아니더라도 3 태자라면 어쨌거나 많은 사람을 부리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이리 느슨한 표정을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그가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한다. 자신의 말이 대체 어디가 우스운 것인지, 아니 우스웠다쳐도 면전 앞에서 이리 웃어도 되는 것인지, 가뜩이나 미운 그가 더욱 미워진다.

 

웃은 것은 미안하네. 허나 어젯밤까지의 그대 태도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는데 하룻밤 자고 나더니 내 일거수일투족에 어깃장을 놓고 단속을 하는 품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런 것이네. 역시 내가 그대를 반려로 고르기를 잘 한 것 같구나.

 

웃으면서 내 한 쪽 뺨을 만진 뒤 귓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내리는 그에게 마음대로 제 몸에 손을 대도 괜찮다 허락해 드린 기억은 없습니다. 라 쏘아 붙였지만 반려의 뺨을 쓰다듬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인가. 하며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에 다시금 뭐라 몰아 부칠 수가 없었다. 단지 현실처럼 생생했던 꿈을 떠올리며 다시금 허전한 손 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

이 곳에서의 삶이 죽도록 싫을 거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평생 그를 미워하며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지도 못 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은 딱 잘라 행동하지 못 하는 것일까.

- 한숨을 내쉬며 서책 하나를 집어 방 밖으로 나온다. 쌀쌀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흘러 넘치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 잠식될 것만 같아서였다.

어제는 첫 날 꿨던 꿈에 이어지는 내용의 꿈을 꾸었었다. 손 끝에 봉숭아 물이 잘 들어있는 그 아이와 다시 만난 꿈을. 그 아이가 뭐라 했더라. 봉숭아 물이 첫 눈 올 때까지 남아있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들었다며 떠들어 댔던 것 같다. 내게 뭐라 뭐라 말을 한 뒤 손을 한 번 꽉 잡고는, 얼굴이 새빨개져 뛰어가는 모습도 보았지만 그 아이의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짤막한 기억이지만 어쩐지 입가에 웃음이 걸쳐져 손을 꽉 쥐어보지만 내 손만 느껴질 뿐 그 아이의 따뜻한 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다. 열흘 간 오이카와 토오루와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침상에 누워 잠을 잤지만 그가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거나 날 범하겠다며 옷을 흐트러뜨리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처음 봤을 때 찾았다 라는 말을 하고 그 말을 한 지 두 달 만에 자신을 반려라며 집에 들이고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반려라 들이면서 혼례를 원치 않을 테니 그대가 원할 때까지 혼례를 미루겠노라 말하는 것 역시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내 멋대로 그대를 반려로 데려가는 것이니, 그대가 원치 않는 것은 하지 않겠다 라며 날 데리고 왔던 말이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3 태자라는 그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그의 성격이 고압적일 거라 답을 내렸었지만 막상 지내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도 의외였다. 자신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대답을 하더라도 싸늘하게 해버리면 화를 내며 손찌검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어떤 훈계의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실이 불편했다. 외로움을 타는 것이 분명한 그에게 씁쓸한 표정을 짓게 만든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간혹 닿는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은 우연히 손이 맞부딪힐 때,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내 머리칼을 쓸어 내릴 때, 혹은 그가 자신의 다짐을 잊고 지금까지 세 번 정도 내 볼을 쓰다듬은 정도였었다. 자신에게 닿는 그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자신도 모르게 붙잡아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건 아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다, 이는 필시 형님의 손을 붙잡고 다니던 자신의 버릇이 남아있어 그런 것이야.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서책에 집중한다.

 

그렇게 책을 보면 목이 아프지 않은가?

 

뒷덜미에 닿는 손길에 몸을 움찔거리자 함부로 몸에 손대지 말라 했는데 내 잊고 그만…” 하는 멋쩍은 목소리와 함께 내 옆에 그가 앉는다. 이런 그의 말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뭐라 화를 낼 수 없게 먼저 선을 그어버리지 않는가. 이러니 미워하려 해도 온전히 미워할 수가 없게 된다.

바깥 공기가 찬데 어찌 밖에서 읽고 있는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이 많아 바람을 쐬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많다라.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그에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라 쏘아 붙이자 잠시만이라도 괜찮다면 손을 내밀어보지 않겠는가. 라 답을 한다. 가뜩이나 그를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하지 못 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진절머리가 나던 참이었는데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손을 내밀어 본다. 혹여라도 그에게 손이 잡힌다면, 혹여라도 그의 손이 너무 따뜻해 놓을 수 없다면, 그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함께.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명주 솜 목도리였다.

 

추위를 많이 타면서 목을 내놓고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 하나 장만해 보았네.

 

그러고는 다시 내 눈을 바라보는 그에게 “…고맙습니다. 라는 대답 이외에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취향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목도리를 매었을 때 무늬가 보이도록 해 보았네.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수를 뜯어낼 수 있다 하였으니 개의치 말고 말을 해주게.

 

그 말에 목도리를 찬찬히 살펴본다. 소담하게 피어 오른 봉숭아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실로 멋스럽게 수를 놓은 것이 여간 훌륭한 솜씨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를 놓아줬을 이를 생각하면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싫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름다워 목에 매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마음에 든다면 되었다. 허나 그렇다 하여 제 기능을 잃게 하지는 말거라. 그대의 목이 쓸쓸해 보여 장만한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 말에 잠시 멈칫한다.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어째서 저 말이 익숙한 것일까.

 

멈칫한 자신을 눈치채지 못 하고 계속 바람을 쐬며 서책을 읽고 싶다면 목에 두르고 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 말하며 내 목을 바라보던 그가 지나가던 시동을 불러 차를 내오라 한다.

 

차까지 내오게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그리도 불편한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반려가 찬 바람을 맞는 것이 걱정되어 내 몸으로나마 바람을 좀 막아주자 하는 것이니 어여쁘게 여겨주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안 되겠는가.

 

그 말에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냐고, 태자의 건강이 제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냐 묻는 자신에게 지난 번 아키테루 공이 입궐했을 때 그대가 추위에 약하다는 말을 들었었네. 평생을 함께 해야 할 반려가 아픈 것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러는 것인데. 라 말하며 빙긋 웃는다.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목도리를 메어주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거절을 해야 한다, 라 머리로 생각하지만 그러시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에게 다시금 환멸감이 든다. 떼어내지도 못 하고 이게 무엇 하는 것인가. 다시금 답답해지는 와중에 때마침 시동이 방 안에서 좌탁을 내어 와 다완을 올려 놓는다. 따뜻한 차를 입에 대니 추위가 조금은 삭혀지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찻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어째서 봉숭아 입니까. 라 묻는다.

 

다완을 들어 올리려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날 바라본다.

 

봉숭아를 수놓은 것이 항간에 유행하는 것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아니면, 하며 마른 침을 삼킨다. 처음 마주친 그 날, 드디어 찾았다 던 그의 말. 함부로 만지지 말라 하지 않았냐는 그의 말. 그것도 예전부터 라는 단서를 붙여서.

 

“…혹여라도, 저희 형님께 말씀하셨다는 어렸을 적 만났다던 그 사람이 저였던 것입니까.

 

그 말에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이 처음 이 곳에서 꾼 꿈에 만난 어린 아이의 웃음과 겹친다.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냐.

온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

나는 듯이라니, 조금은 기분이 상할 것 같구나.

벌써 십수 년도 전의 일을 기억하시는 태자가 신기하실 따름이지요.

하여간 여전히 말 대답은 잘 하는구나. 라 말하던 그가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다른 곳은 다 색이 빠졌는데 그 해 첫 눈이 올 때까지 왼 손 약지의 손톱 끝은 붉은 기가 남아있었지.

그대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모친께서 봉숭아 물을 들여주실 때 농 삼아 했던 말이 있었다네.

첫 눈이 올 때까지 이 물이 빠지지 않는다면 연모하던 이와의 연이 이어질 것이라. 그래서 그대에게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려로 삼겠다. 라며 소리 치고 도망을 가버렸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 인가.

 

꿈 속에서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잡고 한 말이 그것이었던가, 나름 수줍은 고백을 했던 것이었구나 하며 머리를 긁적이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 솔직히 대답을 한다.

 

하긴, 아예 날 기억하지도 못 했으니 그 일은 당연히 기억치 못 하겠구나.

헌데 어찌 저입니까.

 

그 물음에 오히려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 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어찌 몇 번 만나보지도 않았던 저를 반려로 삼겠다 여긴 것입니까? 라 풀어서 되묻는다.

 

어째서 그대인가, 라 묻는다면 대답은 단 하나 뿐이지 않을까. 내게 그대처럼 호되게 가르침을 주면서도 따스하게 끌어 안아준 이가 그 때 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없었기 때문이지. 거기다 난 한 번 내 입에서 뱉은 말은 어기고 싶지 않았기에, 내 힘으로 그대를 다시 찾아 반려로 삼은 뒤 함께 여생을 누리고 싶었을 뿐이었네.

 

평온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에게 어떤 답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알지 못 해 입술만 달싹인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과는 달리 몸은 쉽사리 움직여 그에게로 다가간다.

 

날이 춥습니다. 이러다 태자께서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더 이야기를 나누시죠.

 

먼저 닿은 내 손에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는 그를 눈치채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을 끌어 당겨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고 보니 그 해, 내 손에 물들였던 봉숭아 물도 거의 색이 빠졌지만 첫 눈이 올 때 까지는 남아있었다. 그걸 보고 어머님께 자랑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 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봉숭아 물을 들인 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 때부터 인연이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라는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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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욕이 넘쳤습니다ㅇㅅ;;ㅇ)_ 고전(?)의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처음인 듯 한데 너무.. 어렵..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