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Q!! 엔노츠키] 전력 60분 주제 : 믿음
“신이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 때의 과오를 다시금 범하지 않게 해주소서.”
오늘도 나는 죄를 고한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은 다른 이유로 복잡해져간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접고 또 접어 더 이상 접을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을 때, 그런 때가 온다면 당신을 향한 이 감정을 덜어낼 수 있을까요…?]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이 으스러질 정도로 거센 악력으로 짓누르면서도 두 눈은 어스름한 저녁 빛을 받아 부드럽게 보이는 십자 상을 향한다. 불경하게도 다른 기도를 올릴 때보다 사심을 가득 담은 지금의 기도가 더욱 간절하고 간절하다. 하지만 자신은 이 기도의 답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두 눈을 떨구며 거친 숨을 들이쉰다.
[아니다, 안 될 거야. 그게 가능하다면 난 벌써 당신을 잊었어야 해. 진정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그 날부터 당신에 대한 잡념을 떨쳤어야 하는데 이렇게 잊지 못 하고 있잖아. 오히려 더욱 강하게…]
그 이후의 생각은 하지 않으려 머리를 뒤 흔든다. 혹시라도 생각을 이어 나갔다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흐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최대치를 모른 채 마구 뛰는 왼쪽 가슴을 꽉 누르며 다시금 십자 상을 바라본다.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은 십자 상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본 뒤 깊은 한 숨을 내뱉으며 다시 기도를 시작한다.
“아아, 신이시여. 이 어지러운 마음을 제발 앗아가 주소서, 헛된 상념 따위 재가 되어 흩날리게 해주소서.”
입을 뚫고 나와 내부를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두 귀로 박힌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여전히 자신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단 사실이 느껴지는 듯 했다.
어째서일까, 아직도 난 당신을 향한 마음을 버리고 싶은 것이 아닌 걸까? 지금 이 순간마저도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일까? 무얼 어쩌고 싶은 것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의 늪에서 버둥거릴 때였다.
“오늘도 이 시간에 기도하려 오셨습니까? 정말 당신은 바르고 바른 사제군요.”
그 목소리에 사고가 멈추고 온 몸의 힘이 풀린다. 차분하게 퍼지는 그 목소리엔 자신과 같은 주저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껏 지켜보기만 했지만, 한창 식사가 진행될 이 시간에 매일 같이 올리는 그 간절한 기도가 무엇인지 참 궁금하군요.”
“…그렇게 궁금해 하실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 마음 속 잡념이 사라지도록 기도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울렁이는 감정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을 애써 무시하며 “그럼 식사를 하러 가겠습니다.” 하고 지나칠 때였다.
“그 잡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묻는다면 거절하실 겁니까?”
“…거절해야 맞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묻지 않겠습니다.”
너무나도 산뜻하게 매듭 짓는 그 말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으며 “그럼 먼저 나가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그 역시 내 인사를 받아주며 날 지나쳐 간다.
어떻게 문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잠시 마주쳤을 뿐인데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어째서 나는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일까. 어째서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고 당신을 괴롭게 만들었을까. 어째서 당신이 있는 이곳으로 왔을까. 어째서 그렇게나 거부했던 당신이 내 마음을 받아주고 영원히 함께 하자 말해주리라 믿은 것일까.
“신이시여…”
거짓된 입술로 신의 이름을 다시금 부른다.
신이시여, 제 기도는 언제나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신이시여, 저는 그 사람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제 눈에 처음 들어왔던 그의 단정한 모습을 잊지 못 합니다.
신이시여, 저는 그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과거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절 밀어냈던 그 역시 비난하지 않습니다.
신이시여, 저는 그의 물 잔에 약을 탄 뒤 그를 탐했던 일을 마치 지금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약 기운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제 내부를 꿰뚫고 있단 사실에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늘 단정했던 그 얼굴이 일그러진 그 때의 일을 여전히 가슴 속에 품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이 죄 많은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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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오이츠키] 전력 60분 주제 : 무시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이 끝남을 알리는 인사가 오가는 와중에 체육관 문이 벌컥 열린다. 이 상황을 예상하고 제일 안쪽에 서있긴 했지만 워낙 키가 크다보니 그의 눈에 들어버렸다.
“앗, 있다 있어 안경 군!!!”
신나게 뛰어 들어오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며 한 발자국 물러선 뒤 단호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는다.
“싫습니다.”
“에에, 너무한 거 아냐? 아직 오이카와 씨 아무 말도 안 했다구!”
“안 들어도 알아요. 쓸데없는 말 하실 거.”
“쓸데없다니, 너무한 거 아냐?!”
우는 시늉을 하는 오이카와를 보니 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봐요, 지금 울고 싶은 것은 나라구요?
연습 시합 때 리시브가 약할 것 같다며 손가락질을 당하고 서브를 받았던 순간 이래로 몇 달 동안 반복되는 이 상황에 츠키시마 케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멋대로 날 가리키고 제멋대로 내게 관심을 보이더니 이젠 아주 매번 연습이 끝나는 시간을 귀신 같이 맞춰 체육관으로 찾아온다.
“오이카와 씨는 절대 쓸데없는 말 안 해요,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얘기인데 말이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시죠? 라는 퉁명스러운 말이 입술을 뚫고 나가려는데 눈치 없게도 제왕님이 등판한다.
“오이카와 선배! 점프 서브…”
“싫어! 싫다구 카게야마 저리 가! 아무리 그렇게 비에 젖어 축 늘어진 유기견 같은 표정 지어도 안 가르쳐 줄 거니깐. 휘휘, 저리 가, 저리 가라구! 안경 군 도와줘.”
“잘 됐네요, 오신 김에 제왕님이랑 놀다 가세요.”
제왕님이라는 말에 카게야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라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카게야마 앞을 스가 선배가 막아선 뒤에야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다. 아, 어쩜 이렇게 내 인생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까.
* * *
“그래서 어제도 실패?”
“뭐 당연한 거 아니겠어. 내가 이겼으니깐 다들 방과 후에 슈크림 하나씩.”
“이번엔 좀 잘 되나 했더니, 역시나 오이카와 우리를 실망 안 시키네.”
어쩐 일로 세 명이 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몰려왔나 했더니 내기를 한 모양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내 표정만 보고 알아채는 녀석들이 너무 밉고 또 밉다.
“뭐야, 너네 너무해! 응원해줘도 모자랄 판에 그런 말 하면 오이카와 씨 눈물 난단 말이야.”
“그치만 뭐 우리가 응원해주고 말고 할 것이 뭐 있어. 걔가 말을 받아줘야 일이 진행되거나 말거나 하는 거지.”
머리를 긁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하나마키의 말에 다시금 입술이 비죽 나와 버린다. 정말이지 말도 안 돼, 어째서야 안경 군, 이렇게 잘나고 멋있는 남자가 매일 같이 찾아가면 연락처 한 번은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냐?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 수도 있는 거 아냐? 이런 생각들을 마구 나열하고 있는데 내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이와쨩이 고개를 내젖는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오이카와. 타학교, 그것도 남학생한테 매달리는 꼴 보기 안 좋으니깐 그만 좀 둬라.”
이런 아니었다. 내 생각을 눈치 채긴 개뿔.
“에에- 이와 쨩, 그게 무슨 말이야, 오이카와 씨 상처 받았어.”
“나도 이와이즈미 말에 동의. 거기다 네가 그런 식으로 늘상 찾아가니깐 부담스럽지 않겠어? 그 이름이 뭐더라…”
“츠키시마 였을걸? 연습 시합 때 오이카와한테 지목 받아서 서브 맞았던 애.”
“아, 불쌍하다, 어쩌다 저런 인간한테 걸려서.”
“그렇지? 아무리 같은 팀이라도 오이카와 편은 못 들겠어.”
진지한 표정으로 수군거리는 맛층과 맛키에게“둘 다 미워! 저리 가!”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그러다 이와 쨩에게“교실이거든 멍청카와!”하고 꿀밤을 맞은 다음에야 소란스럽던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린다.
수업은 현대 문학이었다. 그다지 관심 있는 과목도 아닌데다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차버려 샤프를 돌려대다가 선생님께 한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혼나면서도 오늘은 몇 시에 출발해야 안 늦을까, 오늘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 * *
다행히도 오늘은 그가 찾아오지 않았다.
“어라, 오늘은 오이카와 안 오나보네?”
“이제 포기했나보다, 츠키시마 축하.”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하자 가방을 챙기며 축하 인사를 건네던 스가 선배와 타나카 선배가 손을 흔들어준다.
야마구치가 급한 일이 있어 먼저 집으로 가야한다 말했기 때문에 오늘은 홀로 교문을 향해 걷는다. 늘 옆에서 츳키, 츳키! 하고 말을 걸던 그가 없기 때문인 것일까. 무언가 허전하고 쓸쓸하다. 귀가 심심해 헤드폰을 눌러쓴 뒤 음악을 재생한다. 절정으로 다다를수록 화려하게 뻗어나가는 음이 아름다운 곡을 들으면서 한 발씩 내딛는데 계속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조금은 가벼운 듯, 장난스럽게 다가오지만 제법 진지한 얼굴로“안경 군.”하고 다가오던 그를.“오늘은 꼭 연락처 가르쳐줘.”하고 손을 흔들면서도 내가 거절하면 그래? 하고 물러서버리는. 그렇게 연락처가 알고 싶으면 내 손에 쥐어진 폰을 빼앗아 자기 연락처를 입력한 다음에 전화를 걸어도 될 텐데 쓸데없이 신사적일 것은 뭐람. 괜히 길거리에 튀어 오른 돌부리를 발로 걷어차며 상념을 깨버리려 노력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매일 같이 오다가 왜 오늘은 안 오는 건데? 노력이 부족해, 노력이. 그렇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길을 걸을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탁 치는 느낌에 뒤를 돌자 방금 전까지 내 감정을 뒤흔들었던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엄청, 빨리, 끝났네.”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니 달려온 것이 틀림없다.
“오늘도 오셨네요.”
마치 신경 안 쓴다는 말투로 그에게 말을 올려붙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분이 좋아진다. 분명 방금 전까진 기분이 안 좋았는데, 돌부리도 걷어차고, 뭐든 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럼, 당연하지! 오이카와 씨를 뭘로 보는 거야. 오이카와 씨는 뭐든 다 해내는 사람이라고.”
이마에 맺힌 땀이나 닦고 말하지, 혀를 차면서 그의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간다. 늘 피하기만 하던 자신이 다가와서 그런 것일까?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표정이 새롭다.
오이카와 토오루, 아오바죠사이 고교의 주장이자 뛰어난 세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왜 하필 저에요?”
“…응?”
“그렇게 뭐든 다 잘 해내고 뛰어난 당신이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찍은 거냐구요.”
자신의 말에 흐음, 하고 턱을 괴며 뭔가 생각을 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대답에 맥이 풀린다. 뭐야, 자기도 이유를 모르면서 왜 쫓아다니는 거지? 하고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의 입이 다시금 열린다.
“근데 계속 네가 신경 쓰여. 밥을 먹을 때면 지금쯤 안경 군이 밥을 먹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연습을 할 때면 안경 군이 이젠 내 서브를 잘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수업을 들을 땐 내용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네 얼굴만 생각나고, 예쁜 것만 보면 네게 주고 싶어지고, 이런 거로는 안 될까?”
생각지도 못 한 답이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감상적인 사람이었다면 눈물이 차올라서 울음이 터졌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감성보다 이성이 앞선 사람이었기에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뻤다. 나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니, 그렇게 잘난 사람이 말이야.
“그래요? 그럼 오이카와 씨 핸드폰 좀 잠깐 줘보실래요?”
자신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내 손에 핸드폰을 넘긴 다음에야 의도를 알아챘는지“어, 어!!”하고 텐션이 높아진다.
“번호랑 메일 주소 적었으니깐, 앞으로 보고 싶을 때 연락하고 오세요.”
핸드폰을 돌려주는 동시에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오늘처럼 헛걸음할 뻔 하지 않게 말이에요.”
*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작중에서 츳키가 듣는 곡은 발라키레프가 편곡한 The Lark라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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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아카보쿠] 아카보쿠 데이 기념 #1
그러니깐 그건 단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 * *
단합이랍시고 귀중한 금요일을 회식 날로 잡아버린 팀장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기회는 이 때다, 하고 모두가 짠 듯이 팀장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가볍게는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회식하자는 거냐는 말부터 부하 직원을 다루는 태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팀장에 대한 불만부터 회사 생활에 대한 짜증 섞인 말까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귓가를 어지럽힌다. 자신 역시 귀중한 저녁 시간을 회식으로 퉁 치게 된 것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언제 팀장이 자리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고 굳이 한 마디 보탰다가 그 말이 부풀려져 팀장 귀로 들어 가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염려해 조용히 소주 한 잔을 들이킬 때 였다.
“있지, 있지. 다들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
자신보다 한 기수 위의 여자 선배가 꺼낸 말에 분위기는 급작스레 바뀌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팀장에 대한 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애인 자랑을 하는 사람부터 연애하고 싶다며 울부짖는 사람, 연애해서 뭐 하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난 가만히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카아시.’
늘 기세 좋게 내 이름을 불렀던.
‘우왓, 오늘의 나 최고! 어때, 봤어? 내가 피융-하고 날라서 팍-하고 내려치는 모습 말이야!’
언제나 들뜬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걸었던.
‘역시 아카아시야! 한 번 더!’
내가 띄워 준 공을 신난다는 듯이 집어삼키던.
‘…오…오늘은 날이 아냐! 더 이상 나한테 공 올리지 마!’
가끔은 의기소침해지지만.
‘아냐, 역시 난 최고!’
자신의 능력이 빛을 발할 땐 다시금 딛고 일어서던 그 사람.
“…보쿠토 선배.”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아니, 잊으려 노력했던 이름이었다. 몇 번이고 생각나려 할 때마다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려 겨우 지워져가고 있던 그 글자가 다시금 내 기억 속에서 살아난다.
“나 없는 동안 뭔 얘기를 그렇게 신나게 했어?”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팀장이 돌아와 대화에 끼어든다. 다행히도 팀장에 대한 주제는 이미 비껴갔기 때문에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다. 모두들 열을 내며 연애, 사랑, 이별 등등 관련된 이야기를 마구 풀어낸다. 하지만 자신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시끌시끌한 사람들 속에서 나만 동떨어진 것 같다. 그렇지만 말 할 수 없다. 아니, 할 수 있을 리 없다. 내게 있어 사랑은 단 한 번 뿐이었고, 그 상대가 남자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겠어.
* * *
창문을 통해 안으로 밀려오는 공기가 포근하다. 지난 주말 단정하게 잘랐던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먼저 깨어난 선배가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아카아시.’ 하고 이름을 불러줬던 일이 떠올라서였을까. 지금도 내 옆에 선배가 상체만 일으키고 앉아 ‘아카아시.’ 하면서 웃어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아카아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입사 동기였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죄송해요.”
“아니, 뭐 나한테 죄송할 것은 없지. 그나마 나랑 집 방향이 같았으니 다행이지 너 혼자 다른 방향이었으면 어쩔 뻔 했어.”
“죄송해요.”
“혼내는 거 아냐, 아, 아저씨 이 앞 코너에서 세워 주세요.”
익숙하게 카드를 건네며 택시 값을 지불하고 내리는 그에게 “택시비…” 하고 말하며 안주머니를 뒤적이자 “다음 주에 커피나 한 잔 사 줘.” 하며 내 이마를 톡 친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겠어?”
“네.”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니지?”
“아녜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 말에 그가 잠깐이지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몇 달 간 함께 일하면서 봐 온 그는 자신과 똑같은 신입이었지만 불평불만보다는 타인에 대한 장점을 입에 더 많이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동기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는데 뭐 하나만 잘 해도 대단하다, 잘 했다 하고 칭찬을 해주곤 했다. 성격 자체도 시원스럽고 털털해서 나름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의 자신에게 뭐라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별 일 아니에요, 그냥 헤어졌던 사람이 떠올라서.”
그냥 헤어졌던 사람, 이라 자신이 정의내리고도 그 말에 자신이 상처 받는다. 그렇게 말하기엔 나와 보쿠토 선배의 사이는 단순치 않았다. 하지만.
“전 괜찮으니깐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그가 마지못해 수긍하며 뒤를 돌아서자 나 역시 집으로 향한다.
삑-삑- 요란한 기계음을 들으며 도어락 문을 연다.
“다녀왔습니다.”
대답할 사람이 없단 것을 알면서도 난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걸 듯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는 것이 점점 익숙해 졌었다. 뭐든지 두 개씩 있던 방 안은 내 물품만 있는 풍경으로 바뀌었고, 처음엔 그 상황을 못 받아들였던 내 자신도 있었지만 점차 홀로 있는 것이 편해졌다.
‘아, 누구보다도 고독에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주억거리며 주저 앉아버린다.
지금 당장,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쿠토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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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엔노츠키] 전력 60분 주제 : 부정
“안녕하세요.”
체육관 문을 열고 평소처럼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버렸다.
그런 자신을 무시하듯 뒤를 돌아버린 츠키시마의 모습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틀리지 않았어, 어제 봤던 그 사람, 네가 맞아.
* * *
더운 것은 딱 질색이다. 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도,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도,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드는데 한 몫한다. 겨울엔 옷을 껴입으면 되지만 여름은 그게 안 된다. 반 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어도 더운 것은 더운 것이고 바깥에서 오래 있다 보면 피부가 따가워져 질색이다. 그래서 봄이 더 길었으면 좋겠는데...
“...벌써 여름이 다가오나, 왜 이렇게 더워.”
손부채를 부치며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상점가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사야할 참고서도 있는 김에 근처 서점에 들어가 더위를 식혀야지라 생각할 때였다.
“...어라...?”
상점가 앞 시계탑 쪽에 비스듬히 서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살구 색 원피스에 얇은 흰색 반팔 가디건을 입은, 자연스럽게 묶은 긴 머리를 왼 쪽 어깨에 살포시 올려놓은 여자, 수수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그 사람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초조한 듯이 주변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발끝으로 내리는 여자의 반복적인 행동을 보다가 한 발자국씩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지금까지 딱히 연애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에 강렬한 열망을 가져본 적도, 호기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던 내가 왜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은근히 멋을 부린 것이 보인다. 소매 부분에 앙증맞은 리본이 매달려 있는 것이 귀엽다. 희고 가는 손목을 감싼 비즈 팔찌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훤히 드러낸 오른쪽 귀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치렁치렁한 귀걸이를 하고 있지만 나쁘진 않다.
근데 이상하다. 나보다 키가 큰 것은 그럴 수 있다 쳐도 등뼈가 도드라진 것부터 다리 골격까지 너무 익숙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저런 체형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 있긴 하지만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 “...츠키시마?” 하고 장난스레 이름을 불러본다.
딱히 반응이 없기에 ‘에이 역시 아니잖아.’ 하고 지나치려 할 때였다. 순간이었지만 그녀가 어깨를 살짝 떨고 있었다. 혹시라도 어디가 아픈 것일까? 왜 저렇게 몸을 떨고 있는 거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린다. 차가운 태도에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아 버린다.
“...저...저기요.”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멈춰 세우고는 “혹시 어디 아프세요?” 하고 말을 걸 때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 “...아...?” 하고 멍청한 반응을 보이며 손에 힘을 풀자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내 손을 쳐내고는 상점가의 반대편 쪽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친구들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늦어서 미안해.” 라 말하기 전까지 내 시선은 그녀, 아니 그 사람이 지나간 길만 향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을 때도, 함께 노래를 부를 때도, 서점에 들러 참고서를 산 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도, 사 온 참고서를 펴고 몇 페이지를 넘겼을 때도 내 사고의 끝은 그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
* * *
연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뤄졌다. 경직된 몸을 풀어주려 시작된 스트레칭, 순서대로 줄을 선 뒤 리시브 연습, 각각 팀을 나눠 실제 경기마냥 진행된 3판 2선승제 게임까지.
연습이 끝난 다음 체육관에 흩어진 공들을 정리한다. 눈앞에 보이는 공을 집어드는데 누군가의 손 역시 공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혹시라도 먼저 발견하고 다가왔는데 내가 가로챈 것이 아닐까 싶어 “미안.”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츠키시마와 눈이 마주친다. 어제 날 보고 놀랐던 여자의 얼굴과 지금의 츠키시마 얼굴이 겹친다. 내가 계속 눈을 떼지 못 했던 그 사람의 얼굴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츠키시마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여버렸다. 자신의 행동에 츠키시마가 잠깐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무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애 쓰는데 왜 내가 이러는걸까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츠키시마에게서 몸을 밀쳐버린 것이 머쓱해져 “네가 먼저 발견한 거지? 네가 가져다 넣어.”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버린다.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츠키시마가 “네.” 하고 순순히 일어나 공을 정리함에 넣어둔다.
“자, 자, 거의 다 정리 끝났지? 오늘 체육관 청소는 누가 하는 것이 좋을까?”
손뼉을 탁 치며 부원들을 장난기 어린 눈으로 훑어보는 사와무라 선배를 보며 ‘어차피 말만 그렇게 하고 다 같이 하자고 하실 거면서.’ 라 생각하고는 피식 웃을 때였다.
“제가 할게요.”
등 뒤 쪽에서 리듬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츠키시마가 하게?”
“네.”
“나...나도 할게, 츳키!”
“안 돼. 넌 오늘 시마다씨한테 서브 배우러 가야하잖아.”
다소 단호한 츠키시마의 말에 “미안, 츳키.” 하고 어색하게 웃는 야마구치의 모습을 보다가 “그럼 내가 같이 할게.” 하고 자원한다.
그 말에 츠키시마가 미간을 좀 찌푸렸지만 “...그러시던가요.” 하고 긍정의 표현을 한다.
* * *
물걸레질을 하려 걸레 두 개를 빨아왔을 때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츠키시마를 발견하고는 “어디 아파?” 하고 묻는다.
“...똑같네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말에 “응?” 이라 되묻자 “어제랑 똑같은 말을 한다구요.” 하며 츠키시마가 날 쏘아본다.
“뭐야, 무섭게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봐?”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괜히 내 주변에서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무슨 말이 그래? 난 그저...”
“그저 뭐요? 여장한 후배 보니깐 신기하고 재밌었나요?”
그 말에 츠키시마의 반응이 날카로운 이유가 한 번에 이해가 갔다.
“그렇지 않아, 난 그저...”
“그저 뭐요, 어제 당신 날 계속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 시선 못 느꼈을 것 같아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내가 너한테 여장 왜 했냐고 묻기라도 했어,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 네 얘기를 하기라도 했어? 솔직히 따지자면 유동 인구가 많은 길거리에서 여장하고 서있던 네 잘못 아니야?
“그럼 내가 너 여장했다고 놀리는 것이 더 나아?”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요?”
허탈한 듯한 말투에 방금 전의 화가 싹 식어버린다. 저런 말을 들으려고, 저런 표정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상처 입은 것 같은 츠키시마의 얼굴에 가슴 한 쪽이 콱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부정이라도 하지 그래?”
“...부정할 필요도 없잖아요, 내 손목을 붙잡았을 때, 놀라서 돌아본 내 얼굴을 봤을 때 당황한 선배의 표정만 봐도 이미 다 끝난 건데.”
침착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가는 츠키시마의 표정은 오히려 후련하다, 라는 쪽에 가까웠다. 잠깐 자조적인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마음이 편안해진 것인지 “이제 됐죠, 제가 정리할테니 나가세요.” 하는 말까지 한다.
“도와줄게. 너 혼자 여기 다 청소하는 것은 무리야.”
“됐다니깐요, 어서 나가요.”
“츠키시마.”
“그만! 그만 나가 달라구요! 그렇게 말 못 알아들어요?”
방금 전까지 감정의 폭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높아진 목소리에 깜짝 놀라 버린다.
“이제 됐어, 됐으니깐 나가요, 부원 사람들에게 내가 여장하고 다니는 녀석이라고 말하고 다니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구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눈가에 눈물 방울이 살짝 맺힌 것이 보인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아.”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츠키시마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는다.
“네가 원치 않아하니깐 절대로 말하지 않아. 그러니깐 울지 말아줘. 네가 상처받는 것 보고 싶지 않아.”
품에 안긴 츠키시마의 어깨가 달싹인다. 울음을 집어 삼키는 듯한 그의 행동에 등을 쓸어내리며 “미안, 어제 널 봐버린 내가 미안해. 네게 다가가서 츠키시마라고 이름을 부른 것도, 네 손목을 붙잡은 것도 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라 말을 쏟아본다.
“...선배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내가 다...”
“괜찮아, 넌 잘못한 것이 없어, 츠키시마. 처음에 놀라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토닥여주자 “...에...엔노시타...선배...” 하고 울음을 탁 터뜨린다.
늘 어른스러워보였던, 나보다 키가 크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츠키시마가 내게 안겨 어린 아이처럼 운다. 그 모습에 안쓰러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지만 그 마음을 억지로 눌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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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타커플(스가와라-다이치) 요소가 있습니다ㅇㅅ;;ㅇ) 지뢰인 분은 피해주세요...8ㅁ8)
큰일이다. 대면식 시작은 7시, 현재 시간은 7시 20분.
신입생이 되자마자 찍힐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타인과 엮이는 것이 싫기 때문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다가 적당할 때 나와야지라 생각했는데 늦어 버리면 눈에 띄잖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면식 장소로 들어선다. 제일 안 쪽, 여러 개의 테이블을 붙여놓은 곳에 동기들의 얼굴이 보인다. 최대한 선배들 눈에 안 띄게 조심스레 다가가 앉는다.
“어, 츠키시마 늦었네?”
“길을 잘못 들었어.”
“아직 안 온 애들도 있으니깐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 짓지 마. 선배들 다 착하신 것 같아.”
그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물 한 잔을 마신다. 학번이 바로 붙어 있어 새터 때부터 같이 다녔던 코야마는 자신이 타인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한단 사실을 알고 있다. 다정다감하고 남을 잘 챙겨주는 성격이라 그런지 자신에게도 신경을 많이 써주는 편이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여기 계란말이 맛있더라. 좀 더 밝은 쪽은 달달한 맛이고 상대적으로 짙은 노란색 쪽은 알싸한데 입맛 당겨.”
웃으면서 접시를 밀어주는 코야마에게 고맙다 말하며 고개를 까딱인다.
코야마의 말대로 계란말이는 맛있었다. 단 맛과 매운 맛의 두 종류라 그런지 한 쪽을 먹고 나면 다른 쪽이 먹고 싶어져 계속 젓가락이 움직이게끔 했다. 거기다 고기감자조림 같은 평범한 반찬과 된장국 역시 맛이 좋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밥을 반 공기 정도 먹어갈 때였다.
“아, 그 쪽 테이블은 뭐 모자라는 것은 없어?”
왼 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하얀 피부의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그는 정수리 쪽 머리칼이 삐죽 올라와 있었다. 마치 야마구치를 보는 것 같아 반가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밑반찬이 좀 모자라요.”
“오케- 아주머니, 안 쪽 테이블 밑반찬 좀 더 주세요.”
여리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시원스레 쫙 뻗은 목소리에 다시금 눈길이 간다. 자신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가 자신을 향해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상냥한 미소를 짓던 그의 옆에 사와무라 선배가 다가간다. 사와무라 선배는 새터에 왔었던 데다 이학부 과대라 알고 있다.
“스가, 인원 체크는 다 끝냈어?”
“아, 인원 수만 세고 누가 왔는지는 아직.”
“나 도와준다고 해놓고는 오히려 일 늘려주고 있는 것 같다?”
“아냐, 아냐. 그래도 30여명 정도는 체크했다구. 제일 안 쪽 테이블만 체크 안 한 거야.”
“애들 밥 먹다가 술로 넘어가면 테이블 옮겨다닐텐데 지금 빨리 해 둬, 이따 후회하지 않게.”
“네, 네 알겠습니다. 사와무라 과대님.”
“비꼬지 말고.”
어깨를 살짝 치고 자리를 옮기는 사와무라 선배와 우리 쪽 테이블로 다가오는 스가라는 사람을 바라보다 코야마에게 묻는다.
“저 사람은 누구야?”
“저 사람이라니, 혹시 나?”
귓가에 살랑거리는 목소리가 걸린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올렸을 때 그의 얼굴이 들어온다.
“스가와라 코우시. 다이치, 아니 사와무라랑 같은 3학년이야, 음, 네가... 츠키시마?”
“...아, 네 츠키시마 케이입니다.”
“키 큰 친구가 들어왔다고 해서 알고 있었거든. 아까 좀 늦게 들어왔었지? 허리 숙이면서 들어오는데도 키 큰 게 느껴지더라.”
씩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왼쪽 눈에는 작은 눈물점이 있었다.
단순히 저녁만 먹고 끝날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다. 벌써 11시가 가까워오는데 그 누구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술잔이 오가고 몇몇 사람은 담배를 펴 답답한 기분이 든다. ‘시원한 공기가 마시고 싶어.’ 라는 생각에 “잠깐 화장실 좀.”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건물 안 화장실도 있지만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 일부러 건물 밖 화장실 쪽으로 향한다. 4월인데도 밤이라 그런지 날이 쌀쌀하다. 가디건을 입고 오길 잘 했나봐, 라는 생각을 하며 코너를 돌던 때였다. 서로를 껴안은 형태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벽 뒤로 숨어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갈 수도 있지만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낯 뜨거워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쉬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딱히 큰 소용이 없었다.
“안 돼, 다이치.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먼저 유혹한 네 잘못이야.”
두 사람의 목소리, 다이치라 이름을 부르는 것, 내 귀가 틀리지 않았다면 저 사람들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어야 한다. 설마 그럴 리가라 마음을 다잡으며 살짝 벽 뒤를 바라본다. 입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맞았다. 사와무라 선배와 스가와라 선배. 당황하고 놀란 마음은 잠시, 야하게 휘어진 스가와라 선배의 눈매에 시선이 고정된다. 상냥한 미소를 짓던 그 눈매가 저렇게 요염할 정도로 곡선을 그릴 수도 있구나, 순수한 호기심과 조금의 두근거림을 안은 채 나는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라, 츠키시마? 너도 이 수업 들어?”
식곤증을 이기지 못 하고 책상에 엎어져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스가와라 선배...?”
“와, 이 수업 나 혼자만 듣는 줄 알았는데. 동기들이랑 같이 들으려 했던 철학 교양을 나만 떨어졌거든. 다른 수업들이랑 안 겹치는 교양 찾다가 여기 들어온 거거든. 츠키시마는?”
“아, 전, 관심이 있어서.”
“미학에 관심 있어?”
“흥미로워 보여서요.”
“그래? 여하튼 잘 됐다. 같이 수업들을 친구가 있으니 마음이 놓이는데? 정정기간에 찾다보니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잘 모르거든. 츠키시마는 오늘 수업 이게 끝?”
“네. 선배는요?”
“나도. 월요일인 것은 싫지만 수업이 일찍 끝나서 좋아.”
밝게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스가와라 선배에게 나 역시 적당히 웃으며 대답을 한다. 그러면서 계속 그의 눈과 눈물점을 응시한다. 다이치 선배와 입을 맞출 때 부드럽게 휘어지다 못 해 야하게까지 보였던 그 눈이 지금은 자신을 향해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츠키시마, 츠키시마?”
“...네?”
“출석 부르고 있어. 15학번까지 끝났으니 곧 너 출석 차례 다가온다. 정신 차리세요~”
검지, 중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짝 밀면서 그가 웃는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귓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칠판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출석 체크를 마친 뒤 미학의 정의부터 여러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다양한 사진 자료들을 보여주는 교수님의 열의에 모두가 빠져 들어가는데,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이 수업을 듣게 되었다는 스가와라 선배도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는데, 이 강의실에서 오직 나만이 수업 자료를 보지도, 필기를 하지도 않고 있다. 수업에 집중해야지, 집중해야해. 하고 자신을 다독여보지만 마음과는 달리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강의 내용을 써내려가는 스가와라 선배의 손을 세게 잡는다.
“...응?”
놀란 듯이 날 바라보며 “뭐 할 말 있어?” 하고 묻는 그에게 뭐라 말을 할까 망설인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닌데, 어쩌지, 라 생각하다 내게 대답을 재촉하는 그에게 “이...이따 같이 집 갈래요?” 라 말해버린다.
“집? 너희 집?”
“아...아니 꼭 그건 아니더라도... 어, 저기 저희 집 가는 길이 예쁘거든요. 벚꽃도 많이 폈고...”
말을 더듬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가와라 선배가 웃는다.
“그래? 그럼 같이 걷지 뭐. 나 꽃 좋아하거든.”
흔쾌히 승낙하는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다행이다, 겨우 잘 넘어갔어.
“너 근데 그 말하려고 계속 날 바라봤던 거야?”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네?” 하고 큰 소리로 묻는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나왔는지 주변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쳐다본다. 꽂혀오는 시선들에 놀라 어깨를 움찔하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교수님 쪽으로 향했을 때 스가와라 선배를 바라본다.
“너 출석체크하기 전부터 멍하게 있었잖아. 수업 시작한 다음에도 계속 날 바라보고.”
야살스럽게 웃으며 내 뺨을 톡 치는 그의 행동에 지난 금요일 밤의 기억이 겹쳐 흐른다. 혹시 그 때 내가 있단 사실을 눈치챘다면 선배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스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단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그 날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하게 박혀버려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러게요, 저 얼마나 선배랑 같이 하교하고 싶었길래 수업에 집중도 못 하는 걸까요.”
겉으로는 웃으면서 적당히 대꾸를 하지만 속은 뜨겁게 타오른다. 당신이 그렇게 야한 눈매를 지어보이고 입을 맞춰주는 상대가 나라면 어떨까하고.
“그러니깐 이따 같이 집에 가요. 선배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어쩌면 그를 처음 보자마자 이름이 뭔지 알고 싶었던 때부터 난 그에게 빠져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관심 갖는 행위는 늘 다가갈까 망설이다 포기하는 것으로 끝났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조금은 다른 의미의 관심이지만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한 걸음씩 다가가 그의 손을 낚아채버리고 싶은 욕망마저 꿈틀거린다.
“수업이나 열심히 들으세요, 츠키시마군.”
물론 사람 좋게 웃으며 다시 필기에 집중하는 스가와라 선배의 단호함에 조금은 머쓱해져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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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내가 청소 당번일 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이카와 선배, 좋아해요!”
어이, 어이, 고백을 하려면 최소한 옥상 위처럼 남의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 하란 말이지. 한숨을 내쉬며 쓰레기봉투를 내려놓는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말도 안 들리는 듯 헤드폰을 눌러 쓰고 쓰레기만 버리고 와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고백일 순간에 쓰레기가 지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잖아? 라는 생각에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란다.
“아, 저기, 리카코쨩이라 했던가?”
살랑거리는 목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귓가에 걸린다.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이 가득한 것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인기 있을 타입인게 느껴진다. 들려오는 말투만으로도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게 새 학기가 되자마자 커플 하나가 탄생할 느낌이다. 빨리 승낙하고 자리에서 비켜줬으면, 하고 봉투의 묶음 부분을 그러쥘 때였다.
“선물은 고맙지만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어라, 의외다. 방금 전과 목소리의 톤은 변화가 없는데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차갑다. 차라리 처음부터 냉정한 말투로 말했더라면 이런 느낌은 안 들었을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고백한 여자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상처 받을텐데...
“...아...죄...죄송해요...”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냐. 리카코쨩도 알다시피 난 이제 3학년에 올라가고 수험 준비를 해야 할 입장이거든. 지금까지는 부 활동도 열심히 해왔지만 미래를 생각해서 1년 정도는 어떤 것에도 속박 받고 싶지 않아.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냐, 내 말 알겠니?”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왜 네가 혼나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선생님처럼 논리 정연하면서도 선을 딱 그어버리는 말에 박수가 나올 지경이다. 처음 들었던 목소리만으로는 전혀 생각지 못 했던 단호함에 대체 ‘오이카와 선배’ 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건물 모퉁이만 돌면 바로 그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보지 않는다. 괜히 타인의 고백이 어그러진 모습을 눈에 담아봤자 서로가 좋지 않을테니.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쓰레기봉투를 끌고 멀리 떨어진 기숙사 건물로 향할 뿐이었다.
* * *
내가 입학한 학교는 조금 특이했다. 주택가와 십여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학교임에도 전원 기숙사제에 기숙사 방은 1,2,3학년 각각 한 명씩 총 셋이 함께 거주하는 형태다. 나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선배는 2학년인 엔노시타 치카라와 3학년인 스가와라 코우시다. 평소 말이 없고 후배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 두 선배는 꽤나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먼저 말을 걸어주고 매점에서 음료를 사준다거나. 그런 선배들이 자신의 물음 하나에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뭐 잘못 물어봤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3분 전에 자신이 했던 질문을 곱씹어본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 어때요?]
이게 그렇게나 이상한 말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을 다시금 바라본다.
“어...아니 잘못 물어본 것은 없어.”
평소 같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스가와라 선배였다.
“단지 입학한지 얼마 안 되는 너도 오이카와 선배의 얘기를 들을 정도면,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엔노시타 선배의 말에 “뭐 이상한 사람인가요?” 라 물으며 종이컵을 입에 갖다 댄다. 급작스레 밀려들어오는 사이다 탓에 목 안이 따끔거리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궁금증이 먼저였다.
“오늘따라 궁금한 것이 많네, 츠키시마. 평소엔 말도 별로 안 하면서.”
“아니, 그냥, 궁금할만한 일이 있어서 물어봤지만 안 가르쳐주셔도 괜찮아요.”
자신의 말에 엔노시타 선배와 스가와라 선배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한 명씩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이상한 사람은 아냐, 오이카와 선배 사람은 괜찮아, 여기저기 잘 끼어들지만 착하고 다정하니깐 2학년 사이에서도 인기있거든. 단지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와도 사귀지 않는게 유명한 것뿐이거든.”
“거기다 이유가...뭐라더라, 자기한텐 운명의 상대가 따로 있어서 그런 거라나?”
“...운명의 상대요?”
“응, 자기한테는 아직 만나지는 못 했지만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늘 말해왔대. 이름을 알고 있으니 꼭 만날 거라 말하던데 허무맹랑한 소리지, 뭐.”
장난스럽게 웃으며 스가와라 선배가 포키로 손을 뻗는다.
“이제 궁금증은 풀리셨나요, 츠키시마 후배님?”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 포키.”
스가와라 선배가 건네주는 포키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으면서도 ‘운명의 상대’라는 말에 신경이 쓰인다. 나 역시 그렇게 기다리는 운명의 상대가 있으니깐.
* * *
고교 입학을 한 달 정도 앞 둔 때였다.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설 때 갑작스레 왼쪽 쇄골 있는 쪽이 뜨거운 쇳덩이에 달궈지는 것만 같았다. 고통에 몸부림을 쳐댔지만 재수 없게도 그 날 따라 집에는 나 혼자만 남아있었다. 간음을 한 여인의 얼굴에 낙인을 찍었다는 고전 소설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난 간음을 하지도 않았는데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는 원망마저 들며 정신을 잃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욕실 바닥에서 웅크린 몸을 일으켜 세우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두통의 기운에 벽에 기댔을 때였다. 정신을 잃게 할 정도의 통증이 있었던 쇄골에는 [토오루]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그 이름을 본 순간 일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운명적인 상대의 이름이 신체의 일부에 적히는 때, 당신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렇다, 이건 분명 내 운명의 상대 이름이다.
“토오루...”
입 밖으로 조심스레 그 이름을 내뱉다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면서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그 이름이 보이지 않게 옷을 단단히 입었다. 그러고는 그 책을 꺼내 다시금 읽기 시작했다. [운명의 상대를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 세계에서 0.001%도 안 될 정도.] 그 말을 본 순간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연애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내게 운명의 상대가 있을거란 생각도 한 적이 없었고 운명의 상대라는 것이 말이 되냐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자신의 쇄골에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순간, 책에 써있던 말이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 * *
흐아암- 하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옆 자리의 야마구치가 “어제 잠 못 잤어, 츳키?” 하고 말을 건다.
“아, 응, 선배들이랑 과자 먹으면서 놀다가 좀 늦게 자는 바람에.”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인 대답을 하며 잠이 들지 못 했던 이유를 되새겨 본다.
운명의 상대를 만날 때가 될 때 이름이 새겨진다던데 자신은 아직도 그 사람을 만나지 못 했다. 하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제 엔노시타 선배와 스가 선배의 말을 떠올려 봤을 때 최소 1년 반 정도는 저러고 있는 것 같으니깐.
‘나는 언제가 되어야 운명의 상대를 만날까...?’
머릿속이 어지러운 그 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이카와 선배다!” “꺅, 오이카와 선배가 1학년 층에는 어쩐 일이지?” 술렁이는 여자애들의 틈바구니에서 “미안, 잠깐 지나갈게?” 하며 어제 들었던 다정한 목소리가 자신 쪽으로 다가온다.
“네가 츠키시마 케이, 맞지?”
차가움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따뜻한 햇살처럼 부드러운 음색에 자신 앞에 서있는 남자에게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상큼한 미소와 함께 “반가워, 내 이름은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해.” 라 말하며 왼손을 내미는 그의 행동에 “...왼손잡이세요?” 라 물으며 나 역시 왼손을 내밀 때였다. 살짝 손목을 걷어붙인 오이카와 토오루의 손목에 선명히 적혀있는 [츠키시마 케이]라는 여섯 글자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본 뒤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기다리고 있었어, 케이쨩.”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그를 외면하듯 바라보지는 못 하지만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면 상대의 이름이 써진 부분이 뜨거워지며 사랑하는 마음이 온 몸을 감싸버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타오를 것만 같은 쇄골 쪽의 셔츠 부분을 붙잡으며 겨우 “토오루...” 하고 이름을 내뱉을 뿐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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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아사츠키] 전력 60분 주제 : 데이트
대학 신입생. 좋을 때다. 이 좋을 때를 난 왜 시덥지 않은 연애놀음에 바쳐야 하는 것일까. 거기다 이건 진짜 연애도 아닌데.
“아…저기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츠키시마입니다. 연애 대행을 부탁하셨으면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지 그래요?”
날이 선 자신의 말에 눈 앞의 상대가 히익-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 * *
이 연애 놀음의 시작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같은 학교의 수험을 쳐 다행히도 함께 합격을 한 나와 야마구치는 타과가 되었지만 시간이 맞을 때 마다 이전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 날은 점심 시간이 맞아 떨어진 덕에 함께 학식을 먹고 있었다. 학교 생활 얘기를 나누며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야마구치가 자신과 친해진 선배 얘기를 시작했다.
“근데 말야 그 선배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깐 나보다 키 큰 사람이랑 데이트 해보고 싶어.’ 라 말하며 술자리에서 울기 시작하는 거야. 선배가 키 크다 보니깐 선배보다 키 큰 사람은 커녕 비슷한 키의 여자 친구도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에- 뭐야 그 사람 별로네.”
생각지도 않은 얘기의 흐름에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그 말에 야마구치의 눈이 동그래지며 손을 마구 내젓는다.
“아, 아냐 츳키! 아즈마네 선배가 얼마나 좋은 분인데. 내가 술 잘 못 마시는 거 알고 일부러 옆 자리로 와서 오는 술들 다 막아주셨단 말이야. 거기다가 나한테 계속 잘 해 주시고…”
“그렇게 쉽게 상대방을 믿는 거 아냐, 야마구치. 친한 척 접근해서 순진한 너를 속이고 나중에 뒤통수 칠지도 모른다고. 거기다 보통 후배랑 술 마시면서 그런 이유로 울어? 이상한 사람 아니야?”
“츳키 너무해…”
그 말을 끝으로 야마구치와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시무룩한 표정의 야마구치를 계속 보자니 마음에 걸린다. 이런 식으로 말 할 것 까지는 없었는데 나와 만나서까지도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는 것이 은연중에 마음에 걸렸던 탓일까.
“그럼 내가 대신 그 아즈마네 선배라는 사람 만날까? 네 얘기 들어보니깐 나보다 키 작은 것 같은데. 남자라도 괜찮다면…”
야마구치의 기분을 풀어보겠다는 이유로 시작한 말이었을 뿐이었는데.
* * *
하, 정말 최악이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지만 덩치도 있고 수염도 기른 사람이 무슨 말만 하면 맹수 앞에 놓인 초식 동물 마냥 움찔거리고 내 눈치만 살핀다. 이래가지고는 데이트의 ㄷ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저기 말이죠, 아즈마네 씨.”
“네…?!”
“내가 무서워요? 왜 내 말, 행동 하나하나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래요?”
“무…무서운 건 아닌데, 저기 그게…”
말을 더듬거리며 입을 뻐끔대는 상대를 바라본다. 뭔가 말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우리 만난 지 20분은 된 거 알아요? 근데 아직 어디 갈지도 안 정했잖아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 해 보세요, 이왕 나온 김에 제대로 데이트 행세 해주고 갈테니깐.”
“가고 싶은 곳…”
내 말을 따라 하며 상대방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더니 곧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사실 어디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냥 평범하게 손 잡고 길을 걷는다거나 이-렇게 커다란 솜사탕을 함께 나눠먹는 데이트를 상상해 봤을 뿐인데, 하하, 그런 거는 우리한테 안 어울리잖아요.” 라 말한다.
평범한 데이트, 상대방이 말하는 그런 데이트는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애교 많고 귀여운, 아즈마네 씨보다 최소 20cm는 작은 여대생이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오빠, 우리 저거 먹자!’ 하고 손을 끌고 작은 상점으로 다가 가 독특한 색상의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길거리를 걷는 것이 잘 어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전 괜찮아요. 아즈마네 씨가 원한다면 한 번 해보죠, 뭐. 일단 손부터 잡을까요?”
손을 내미는 자신의 모습을 그가 조금은 놀란 듯이 바라본다.
“뭐 해요, 빨리 잡지 않고.”
짜증 섞인 말투로 재촉하자 “아, 아, 응, 알았어.” 하고 내 손을 잡는다. 긴장이라도 했는지 그의 손바닥이 축축하다. 하지만 여기서 싫은 내색을 했다가는 또 다시 내 눈치를 보며 쭈그러들까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솜사탕은 어디서 파는지 모르니깐 예쁜 카페나 들어가요. 이야기 좀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보는 것도 좋고. 어쨌거나 이건 데이트니깐 분위기는 내봐야 하지 않겠어요?”라 말한다. 그 말에 아즈마네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지 5분 정도 지났을 때 커다란 유리 창문이 인상적인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메뉴 판을 보아하니 밀크 티와 각종 타르트들이 주력 상품인 것 같다.
“여기 들어갈래요?”
“어, 좋아. 들어가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긍정의 표현을 하는 그의 모습에 ‘정말 내가 무서운가…?’ 라는 의문이 다시금 들었지만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카페 내부는 은은한 간접 조명 덕에 분위기가 꽤 좋았다. 추천 메뉴대로 시켜 본 티도 부드럽고 맛이 있었으며 레몬 타르트는 시지 않고 촉촉했다.
“밀크 티 처음 마셔보는데 맛있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자 어째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틱틱 거리며 핀잔을 줘댔던 자신의 앞에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왔던 사람이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의외로 표정이 다양한 것이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마음이 탁 풀어져 기분 좋다는 미소를 지을 땐 상대방마저 얼어 붙어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릴 정도로 ‘무해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저기요, 아즈마네 씨.”
“응?”
“다음엔 어디로 데이트 하러 갈래요?”
무언가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야마구치가 ‘좋은 선배’라 말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처음엔 답답하다 생각했던 느릿한 말투와 우물쭈물한 태도마저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편해지는 이 느낌이 싫진 않다.
“가고 싶은 곳 생각해 둬요. 다음에도 나한테 맡기면 화 낼 테니깐.”
말로는 차갑게 내뱉지만 나중에 함께 놀이공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관람차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내 팔목을 붙잡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못된 생각과 함께 미니마우스 머리 띠를 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아즈마네 씨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웃음이 나와 피식- 하고 웃자 "...왜, 왜 웃어...?" 하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즈마네 씨가 날 바라본다.
"아니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나중에 아즈마네 씨랑 어디 가볼까 생각한 것 뿐이니깐 그렇게 무서워 하지 마요."
겁에 질린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가 있다. 이러다 혹시 진짜 연인처럼 데이트 하게 되는 것 아냐?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에이, 그럴 리가.” 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며 다시금 밀크 티 한 모금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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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오이츠키] Sweet, Sweet, Sweet
[오이츠키] Sweet, Sweet, Sweet (St. Valentine’s Day 기념)
아침부터 운이 없더라니.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실수 연발이다. 방과 후 연습이라 다행이지 이게 만약 본 시합이었다면 예선 첫 게임부터 탈락임에 틀림없다. 엉망진창으로 한 세트를 겨우 마친 뒤 벤치로 돌아와 드링크를 마신다.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며 한숨을 내쉬는데 옆으로 이와이즈미가 다가오더니 “땅 꺼지겠다. 한숨 좀 그만 쉬어!” 라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며 수건으로 등을 찰싹 때린다.
“아얏, 이와쨩, 아파!”
“아프다고 소리 지를 힘이 있으면 기운이나 내라, 쿠소카와. 오늘따라 왜 이러는데?”
그 말에 입술이 삐죽 튀어 나온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급히 뛰어나오다 집 앞 골목에서 넘어져 왼쪽 무릎이 까진 것도, 교문에 들어서고 나서야 넥타이를 안 매고 왔단 사실을 깨달은 것도, 출출한 김에 매점으로 달려갔는데 눈앞에서 마지막 우유 빵이 팔리는 것을 본 것도, 점프 서브가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실패한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다.
“칫.”
“뭐야 그 칫은? 설마 너 그 뭐냐, 안경 군? 걔랑 또 싸웠냐?”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순간 어깨를 움찔한다.
“정답이네, 정답. 이번엔 뭔데?”
“이와쨩한테 말해봤자 아무 것도 해결 안 되는데 왜 말 하래?”
이와이즈미의 탓이 아닌데도 그저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너 나한테 한 대 더 맞을래?” 라며 수건을 붕붕 돌리기 시작한다.
“히익-”
두려움에 떨며 하나마키와 마츠카와 뒤에 숨으려 하지만 두 사람은 날 숨겨주려 하기는커녕 “자, 여기 오이카와.” 하고 이와이즈미 앞에 대령시키는 것이었다.
“너네 다 미워!”
억울함을 호소해 봤지만 그 누구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말이지 오늘 하루는 최악이다.
* * *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이와이즈미가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그 물음에 갑자기 설움이 밀려온다.
“...이...이와쨩...”
울먹이며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계속 부르자 징그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밀어대며 “야, 너 이런 짓은 걔한테 가서 해. 나한테 하지 말고.” 라 짜증을 낸다.
“그치만... 그치만 안경 군이 며칠 째 연락을 안 받는 걸!”
결국 오늘 내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 이유를 이와이즈미 앞에서 내뱉고야 만다. 한 번 입이 열리고 나니깐 온갖 서운했던 말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있지, 있지 이와쨩. 정말 너무하지 않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걸까? 안경 군이 연습하느라 지쳤다 그러기에 팔도 주물러주고 힘내라고 줄 서야만 살 수 있는 딸기 타르트도 사줬단 말이야. 집까지 바래다주는데 ‘저 너무 힘들어요. 빨리 자야겠어.’ 라 하길래 잘 자라고 볼에 입도 맞췄다고. 난 진짜 안경 군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나 이러다 안경 군한테 차이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러니깐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 날 이후 너한테 연락이 없다 이거?”
이와이즈미의 한 줄 정리를 듣고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하고 고민을 하던 이와이즈미가 “내가 연락 해볼까?” 라 묻는다.
“뭐? 이와쨩이? 에, 싫어.”
“뭐야 그 반응.”
“안경 군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랑 연락하는 거 싫단 말이야.”
“...네 그런 점 때문에 안경 군이 너한테 질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심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는 이와이즈미에게 “너무해.” 라 말하며 밀크셰이크만 쭉 빨아올린다.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속 우울해 하는 내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이와이즈미가 우유 빵 두 개를 사 내 손에 들려줬다.
“이거 먹고 좀 쉬어라. 내일 보자.” 하고 내 등을 툭툭 쳐 준 이와이즈미가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골목에서 꺾을 때였다. 흔치 않은 커다란 인영에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입을 막으며 ‘말도 안 돼.’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부 활동 끝나고 어디 들렸나보네요.”
그런 나와는 달리 너무나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건 사람은 며칠 동안 날 괴롭힌 근본인 안경 군, 츠키시마 케이였다.
“아...안경 군?”
“뭐에요, 왜 그렇게 놀래.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미간을 찌푸리는 츠키시마의 모습에 움찔했다가 잘못한 거 있냐는 물음에 발끈한다.
“자...잘못은 안경 군이 했잖아! 내 연락도 안 받고!”
“아, 연락. 그건 미안해요.”
너무나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츠키시마의 모습에 눈이 동그래질 뿐이었다. 오늘따라 이해가 안 되는 일들 투성이다. 아침부터 안 좋았던 운들, 며칠 만에야 만난 츠키시마의 평소와는 다른 태도.
“그럼 갈게요.”
“...에?”
갑작스러운 츠키시마의 말에 뭐지, 나 또 뭐 잘못한 거지? 라는 생각이 들며 “자...잠깐만!” 하고 붙잡을 때였다.
“아, 저기 가더라도 이건 드리고 갈게요.”
내 눈 앞으로 츠키시마가 불쑥 내민 것은 서툰 솜씨로 금색 리본을 매단 갈색 상자였다.
“받아요.”
“응?”
영문을 모른 채 상자를 받아들자 “어차피 오이카와상이라면 두 손에 들어도 다 못 들 만큼 많이 받겠지만, 주고 싶었어요.” 라 말한다.
그 말에 내일이 무슨 날인지 떠올린다.
“아, 서...설마 발렌타인 초코?”
“네.”
담백하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귀 끝이 빨개진 츠키시마의 모습이 귀엽다.
“우와! 우와! 나한테 주는 거야?”
“그럼 오이카와상한테 주는 거지 누구한테 주는 거겠어요?” 라 쏘아 붙인 뒤 “제가 만든 거라 맛은 없겠지만요.” 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지...직접 만들었어?”
“네.”
손을 꼼지락대며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초코 만드는 거 배우느라 연락 못 했던 거에요.” 라 말하는 츠키시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츠키시마!” 하고 그의 품에 달려든다.
“너무 고마워, 사랑해!”
“...애에요? 초코 하나 가지고 그러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츠키시마가 웃는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웃음이 나온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츠키시마가 준 초콜릿 박스부터 시작해 초콜릿 하나하나까지 다 사진 찍어놓고 내일 이와쨩에게 자랑해야지, 안경 군이 날 위해 이렇게 해 줬다고.] 라 생각하며 츠키시마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이건 일단 미리 주는 초코. 내일은 더 맛있는 초코를 줄게.”
“...호색한이세요?”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내 입맞춤을 받아주는 츠키시마의 손을 꽉 붙잡으며 내일, 발렌타인데이 당일엔 어떤 것을 할까 기분 좋은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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