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Q!! 츳키른] 달의 앞면 ▒ 26
실용영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양 수업에 늦지 않도록 빠르게 교양관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수업에 늦지 않고 앞자리에 앉아 출석 체크를 기다린다.
고학번부터 이름을 불러나가는 교수님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듣다가 '스가와라 코우시' 라는 이름이 불린 뒤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신이 퍼뜩 든다.
당연히 수업에 들어왔으리라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선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팔려 내 이름이 불렸을 때 하마터면 대답을 하지 못 할 뻔 했다.
왜 안 계신거지, 어디가 아프신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핸드폰을 켜다가 지난 월요일 스가 선배와 주고받던 문자가 눈에 들어온다.
오이카와상과 함께 놀러간다는 문자 이후로 살짝 어긋났던 시간, 더 이상 답문이 오지 않았던 것.
설마...스가 선배가 날 피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과 상관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님, 주변의 수많은 학생들이 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런 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 이 답답한 마음을 풀어버리지 못 한다면 안 될 것 같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교수님께 "죄송합니다, 교수님. 생명대 1학년 츠키시마 케이 오늘 결석 처리로 해주세요." 라 말하고 밖으로 나와버린다.
혹시라도 스가 선배를 만나지 않을까 하고 무작정 캠퍼스를 걷고 또 걸었지만 스가 선배는커녕 아는 사람을 하나도 만나지 못 했다.
그나마 카라스노 모임에 가면서 다시 연결되었다 생각했던 인연의 끈이 다시 옅어지는 것인가 싶어 그 날 내가 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책을 한다.
하지만 자책을 해봤자 소용이 없단 것을 내 자신이 더 잘 안다.
스가 선배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거니와 거짓말을 해 그 순간을 모면했다 치더라도, 나중에 선배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치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선배, 오늘 교양 수업 왜 안 오셨어요?] 라는 짤막한 문자를 보낸다.
문자의 답이 올지 안 올지는 알 수 없다.
월요일 밤처럼 답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무슨 일이 있었다며 아무렇지 않은 답이 올 수도 있다.
고백을 받은 다음 날부터의 스가 선배를 떠올려 봤을 때 연락이 안 올 가능성이 조금은 더 크단 것을 안다.
그러나 이후 나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에 후회를 느꼈다며 다시 다가왔던 선배를 생각하면 이대로 날 피할 리 없다는 생각 역시 든다.
그래서일까, '금요일엔 오전 수업만 있으니 끝나는 대로 빨리 내려갈게요.' 라 했던 말을 무시하듯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조금 늦게 내려가게 될 것 같아요.] 라 우카이 상에게 문자를 보낸다.
문자가 오자마자 확인을 할 수 있게 진동으로 바꿔놓은 뒤 초조한 마음으로 교양관 앞을 두 번쯤 서성였을 때였다.
진동이 느껴져 화면을 보자 [미안, 이제 일어나서 못 갔어.] 하는 스가 선배의 답장이 와있었다.
스가 선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런 문자를 보냈다면 믿었을 수도 있다.
그치만 다른 누구도 아닌 스가 선배한테 이제 일어났다는 말도, 그래서 수업에 못 간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추궁을 할 수는 없었다.
스가 선배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답문 대신 스가 선배의 집으로 향한다.
다행히도 선배의 집을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입시를 위해 하루 먼저 이 곳으로 올라왔을 때 우연히 스가 선배를 만났었다.
혹시라도 선배를 만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 넓은 캠퍼스에서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본관 앞에서 마주쳤을 때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수험표를 떨어뜨릴 뻔 했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래?" 하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을 짓던 스가 선배는 "내일 논술 있어?" 하고 물어봤었다.
"네-"
"그럼 연락하고 오지 그랬어. 나 이 학교 다니는 것도 알고 있잖아?"
"...부담스러울까봐..."
"부담? 내가?"
"...네."
"부담스러울 것이 뭐 있어. 시험 보러 오는 네가 부담스럽다면 몰라."
"선배 학교 생활도 바쁜데 아직 이 학교 학생도 아닌 제가 불러내기도 그렇고..."
"서운하게 뭔 소리야. 나야 아는 사람이 많으면 더 좋지. 너도 그렇지 않아?"
동의를 구하는 선배의 들뜬 목소리에 나 역시 조금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네, 저도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지금 네 시니깐... 점심은 먹었을 것 같고.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을래?"
"아, 제..제가 살게요."
"뭔 소리야, 오랜만에 후배 만났는데! 내가 사야지. 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모르겠어요."
"야, 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있다고 말해. 그래야 그거 먹고 힘내서 내일 시험 잘 보지."
"...선배가 추천 해주시는 걸로 먹을게요."
"그럼 돈가스 먹을래? 내일 잘 하라는 의미에서."
씨익 웃으며 내 가슴팍을 치는 스가 선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품고 있던 긴장감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선배가 데리고 간 돈가스 집은 작고 허름했지만 맛이 꽤 있었다.
평소 입이 짧다는 말을 듣는 나였지만 이 날 만큼은 정신이 없이 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먹다 체하면 어쩌려고..." 하는 선배의 말에도 "괜찮아요." 하고 먹었으니깐.
저녁을 잘 먹고 나온 뒤 감사하다 인사를 하는 날 붙들고 스가 선배는 "혹시 모르니깐 약 좀 사자."하고 근처 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에 들어가자마자 체했을 때 먹는 알약, 물약은 물론이고 사혈 침과 알콜 솜까지 챙기는 스가 선배를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내가 저지당해버렸다.
"시험보다가 아프면 어쩌려고 해. 혹시라도 밤중에 아플수도 있으니깐 챙겨놓는게 나아."
단호하게 말하는 스가 선배 앞에서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어 잠자코 계산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약국에서 나오자마자 스가 선배가 들고 있던 약국 봉투를 내게 내민다.
"이거 잘 들고 가고. 아 맞다, 근데 어디서 자려고?"
"...어, 여기서 몇 정거장 가면 호텔이 있다길래 거기서 잘까하구요."
"...뭐야 예약도 안 하고 무작정 올라온거였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던 스가 선배가 "그럴거면 우리 집으로 가자." 라 제안을 했다.
"...네?"
"어차피 예약도 안 했다며. 괜히 갔다가 방 없으면 어쩌려고. 거기다 지금 너 그냥 보내기엔 마음에 걸려서 안 돼."
"마음에 걸릴게 뭐가 있어요. 거기다 제가 있으면 선배 잠도 못 잘텐데-"
"너 평소답지 않게 급히 먹었잖아. 아플까봐 걱정돼. 차라리 내 눈 앞에 있는게 낫지, 너 보내면 오히려 잠 못 자."
나를 잡아끄는 선배의 따뜻한 손길과 애정어린 눈빛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만약 형이었대도 내게 이렇게 대했겠지, 라는 생각도 없잖아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선배의 집으로 갔었다.
다행히도 스가 선배의 걱정과는 달리 난 아프지 않았다.
거기다 돈가스의 위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정하게 날 잡아 이끌었던 선배의 마음 씀씀이 덕분이었을까, 그 해 제일 까다로웠던 논술고사라는 이름이 붙었음에도 나는 당당히 합격을 해 지금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의 생각을 더듬어가며 스가 선배의 집 앞까지 찾아와 버렸다.
똑똑- 조심스레 노크를 하며 "선배." 하고 불러본다.
문 안 쪽에선 어떤 반응도 없었지만 선배가 안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확신이 없어 전화를 걸어본다.
내가 선배의 집까지 오는 동안 선배가 잠깐 밖으로 나간 것일까.
집 안에서 어떤 반응도 없고 전화마저 울리지 않자 그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다시 한 번 노크를 할까 하다가 괜히 주변 집에 폐 끼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선배 집 앞에 와 있어요] 하고 문자를 보낸다.
그러고는 곧바로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으니깐 만나주세요] 하고 또 다른 문자를 보낸다.
[스가 시점]
저녁에 술이 당겨 한 잔 했던 것 때문일까, 머리가 울려 잠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으니 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모든 사고의 끝은 한 인물로 향해 있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부활에 모였을 때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보고 싶을거에요." 라고 툭 던지던 그 모습도, 수험표를 들고 본관을 멍하니 바라보던 모습도, 내 쪽을 바라보고 누워서 자던 논술 전 날 밤의 모습도, 고백을 했을 때 눈동자가 흔들리면서도 내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 하던 모습도, 당황했음에도 내게 먼저 말을 걸던 네 모습도, 끊임없이 날 신경써주는 네 모습도 모두 다 눈앞에 선하다.
손을 뻗으면 허상인 널 붙잡을 수 있을까? 하고 "츠키시마." 라 나지막이 네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보지만 허상은 역시 허상이었다.
지금 일어난 일이었던 것 마냥 선명했던 기억의 파편은 현실이 아니었다.
부서져 내리는 너에 대한 기억의 한 조각이 내 가슴을 파고 든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널 보고 싶다 말하고 싶은데, 말할 용기가 없다.
오이카와와 단 둘이 놀러갔던 화요일, 오이카와가 츠키시마에게 고백을 했다면... 만약 그 고백을 받아줬다면 난 널 보고 싶다 말해선 안 될 테니깐.
그런 복잡한 마음에 잠깐이었지만 미친 사람처럼 네 이름을 부르며 울고 싶단 생각마저 해버렸었다.
마음이 불편한 탓일까, 너를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가 않다.
수업을 가야한다는 것은 알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
괜히 학교에 갔다가 널 마주친다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 할 것 같아서.
오이카와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곳으로 널 끌고 갈 것만 같은데 그런 내가 싫으면서도 불쌍해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나를 알게 되면 네가 날 싫어하겠지, 라는 생각마저 들어버렸다.
하지만 [선배, 오늘 교양 수업 왜 안 오셨어요?] 하는 문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널 보고싶다 말할 뻔 했다.
몇 번 심호흡을 가다듬고 겨우 감정을 가라앉혀 [미안, 이제 일어나서 못 갔어.] 라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설마 네가 단 한 번 왔던 내 자취방을 기억하고 심지어 와 줄 줄은 몰랐다.
노크 소리에 주인 아주머니인가 하고 문으로 다가가다 네 목소리에 놀라 숨죽여 뒷걸음질을 쳤단 사실을 네가 알면 웃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네 문자들이었다.
받은 지 십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날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 말하는 네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
스가 호감도 +3 (논술 시험 전 날 스가와 만나 긴장감이 풀리면서)
스가 현재 호감도 = 49+3 = 52
당연한 얘기지만 26화 첫 부분처럼 수업 시간에 저러고 나가면 안 됩니다ㅇㅅㅇ)...나갈거면...조용히.. 알아서....나가야 합니다....ㅇㅅ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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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츳키른] 달의 앞면 ▒ 25
꿈 속 에서의 나는 버스에 올라타려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껴 살짝 뒤를 돌아봤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을 때 잠시였지만 후타쿠치 상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후타쿠치 상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이 손을 흔들며 "조심히 가." 하고 인사를 한다.
하지만 그 말투에 서운함이 묻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이대로 학교를 가선 안 될 것만 같다- 는 생각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하고 말 한 뒤 버스에서 뛰어 내린다.
당황한 표정의 후타쿠치 상을 앞에 두고 "아뇨, 안 갈래요." 라 말하며 그의 손을 잡는다.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후타쿠치 상은 어때요?"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후타쿠치 상이 "...너 말야." 하고 입을 뗀다.
"네?"
"...너 정말..."
맞잡은 손을 끌어올려 얼굴에 갖다 댄 후타쿠치 상이 "내 심장 터지게 할 일 있어...?" 하고 울먹인다.
울먹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당황스럽지만 내게 이런 식으로 감정을 부딪히는 후타쿠치 상의 모습에 설레게 된다.
떨림이 잦아드는 후타쿠치 상의 등을 쓰다듬으며 자판기에서 뽑아 온 생수를 건넨다.
"이젠 좀 괜찮나요?"
"...응. 괜찮아."
물을 들이키며 숨을 고르는 후타쿠치 상을 바라보다 "알바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못 가게 붙잡은 거죠...?" 하고 묻는다.
"그래. 맞아."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할 거면 오질 말았어야지."
조금 퉁명스러운 후타쿠치 상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하긴 나는 학생이지만 이 사람은 엄연히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제멋대로 행동해 이 사람을 흔든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남은 편이었다.
지금이라면 수업에 좀 늦게 들어가긴 하겠지만 후타쿠치 상의 일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아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럼 갈까요?"
"...뭐?"
"아직 시간 남았으니깐요. 전 늦어도 상관없어요, 후타쿠치 상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갈게요."
그 말에 후타쿠치 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뭐하자는 거야?" 하고 말을 내뱉는다.
"미안하다고 할 거면 오지 말았어야 한다면서요. 거기다 후타쿠치 상 일해야 하는데 내가 방해한 거란 자각은 있어요. 좀 더 빨리 눈치 챘어야 했지만,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하면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후타쿠치 상에게 "그럼 무슨 의미였는데요?" 하고 묻는다.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 하는 후타쿠치 상에게 "빨리요." 하고 재촉을 한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무언가 할 말을 고르는 듯 한 후타쿠치 상을 바라보는데 "...그랬어."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뭐가 그랬다는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내가 쳐다보고 있는 거 눈치챘었잖아." 하는 말이 이어진다.
"나 역시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다 생각했거든. 좀 더 놀면 좋겠다, 나 하루 정도는 알바 땡땡이 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악마의 소리까지 들렸다고. 하지만 네 공부를 방해할 수는 없으니깐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려고 한 건데 그런 날 눈치 채고 네가 먼저 날 붙잡아주고, 내 걱정을 해주고, 미안할 일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미안하단 소리나 하게 만들고. 내가 한심해서 그랬어. 그래놓고 나선 네가 간다고 하니깐 놓고 싶지 않아진 거라고. 으악!"
길게 얘기를 하던 후타쿠치 상이 벤치에서 확 일어나며 자신의 두 뺨을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린다.
갑작스런 행동에 걱정이 밀려오는데 "...나 바보 같지?" 하고 웃는 후타쿠치 상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한 번에 여러 생각을 하고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니깐 이런 일이 벌어진 거겠지, 싶어 "바보 같지 않아요. 이거저거 다 재가면서 이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보다는 현재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모습이 더 보기 좋아요." 하며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 후타쿠치 상의 부어오른 뺨에 손을 갖다 댄다.
"그래도 그렇지, 배구하던 사람이 자기 뺨을 때리면 어쩌자는 거에요? 손 힘 세다는 것도 잊었나봐. 벌써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잖아요."
"...그러게. 하지만 괜찮아, 덕분에 츠키시마가 내 뺨도 만져주잖아?"
금세 장난기 어린 말투로 돌아가는 후타쿠치상의 모습에 나 참- 하고 어이없어 하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
꿈 속 후타쿠치 상의 모습에 웃음을 짓다가 눈이 확 떠진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저절로 일어나버렸다.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야기 현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준비를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침구 정리를 마친 뒤 우카이 상에게 줄 레몬 사탕과 간단한 옷가지를 작은 캐리어 가방에 정렬해 넣는다.
뭐 특별한 것을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캐리어 들고 가는 것은 좀 심한가 싶긴 하지만 이미 꺼내놨으니 어쩔 수 없지, 하며 문 앞에 세워둔다.
=
후타쿠치 호감도 +2 (꿈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후타쿠치 모습에서), +2 (꿈 속에서의 어리광)
후타쿠치 현재 호감도 = 30+2+2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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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이 되지 않아도 너무 안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계속 후타쿠치 상과 함께 있을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수족관으로 돌아갈까? 알바하고 있는 후타쿠치 상 앞으로 다가가서 좀 더 곁에 있고 싶었다 말을 해볼까? 아냐, 이건 너무 제멋대로인 것 같아. 머리를 긁적이다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본다. 헝클어진 머리,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두 눈,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틀린 것 같다. 이럴 바엔 해선 안 될 일인 것은 알지만... 하고 강단 쪽을 바라본다. 타이밍을 재다가 강의에 집중하신 교수님의 눈이 컴퓨터로 향했을 때 화장실을 가는 척 교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휴-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향해 걷는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학관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지만 저 독특한 분홍 머리를 잘못 봤을 리 없다 싶어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를 살짝 친다. 혹시라도 기억을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뒤를 돌아본 하나마키 상이 "오랜만이네?" 하고 입을 연다. 다행히도 나를 기억하는 눈치였다. 하긴 오이카와 상이 내게 하나마키 상 얘기를 해줬는데 반대로 얘기를 안 했을 리 없지, 하고 옅은 미소가 흘러나온다.
“수업 끝나고 나가는 거야?”
“아, 네, 아니, 끝나고는 아니지만.”
“뭐야 그게. 끝난 거면 끝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애매하게 답하고 말이야.”
핀잔을 주면서 휘파람을 부는 하나마키 상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러는 하나마키 상은요, 하는 질문이 입 안에서 맴돈다. 그러다 문득 든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저기, 하나마키상-“
"응?“
"기계과 아니에요?“
"어. 근데 그게 뭐?“
"...아니, 왜 여기 계신가 싶어서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걸지도 모르지만... 기계과면 공학관이나 창의관 쪽에서 수업 많이 듣지 않던가요?"
그 말에 멀뚱히 날 바라보던 하나마키상이 "일반화학 재수강이라 온 건데?"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평소에는 열심히 듣는 편인데 오늘은 몸이 찌뿌둥해서 잠깐 나와 버렸지만.“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는 하나마키상의 말에 나도 모르게 핏- 하고 웃음이 나온다. 나보고는 애매하게 답을 한다 핀잔을 줬으면서 정작 자신도 수업을 듣다 도중에 나온 거잖아? 근데 그 변명도 웃기고.
"뭐야, 그 반응?“
"아니 아니, 비웃은거 아니에요. 단지 잠깐 나왔다는 말이 재밌어서요.“
"시시하긴. 재밌는 것도 참 많다."
짤막하긴 하지만 대답을 계속 이어나가는 하나마키 상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마키 상, 이제 뭐하실 거 에요?" 하고 묻는다.
"글쎄. 아직 점심을 안 먹었으니깐 밥이나 먹을까 싶은데. 왜?“
고개를 까닥이며 날 바라보는 하나마키 상에게 "마침 잘 됐네요, 저도 아직이라." 하고 대답한다.
"그래? 그럼 같이 먹으러가던가."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학식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하나마키 상을 따라 걷는다. 식단표를 보며 어떤 것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에 식권이 쑥 하고 내밀어진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나마키 상을 바라보는데 "내가 살게." 하며 식판까지 챙겨준다. 그다지 말을 많이 해보지 않았던 사이인데다 마이페이스인 느낌이 강하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람을 잘 챙기는 것 같다. 그래서 오이카와 상이 하나마키 상 얘기를 했던 걸까, 싶기도 하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합장하듯 손을 마주친 하나마키 상이 식사를 시작한다. 나 역시 그런 하나마키 상을 한 번 바라본 뒤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대화 주제로 이어나갈 것이 없을까 싶어 고민하다가 "하나마키 상,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거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 말에 국그릇을 들고 후루룩 마시던 하나마키상이 "슈크림-" 하고 단답을 내린다.
"의외네요.“
"의외라니 뭐가.“
"단 것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너야말로 단 것을 좋아하잖아."
그 말에 에-? 하고 새삼스레 놀란다.
"알고 계셨어요?“
"뭘? 아, 네가 딸기 쇼트케이크 좋아하는 거?“
콕 집어서 딸기 쇼트케이크라 얘기하는 것을 보니 오이카와 상이 말한 건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지나가다 봤었어. 케이크 먹는 거." 하고 말한다.
"하두 맛있게 먹길래 얼마 뒤에 나도 가서 먹어봤거든. 맛있더라고.“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얘기를 이어나가는 하나마키 상에게 "맛있게 드셨다니 제 기분이 다 좋네요." 하고 말한다. 그러다 뭔가 엉뚱한 대답인가 싶어 "제가 사드린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웃기지만요." 하고 말을 덧붙인다.
그 말에 "흐음-" 하고 뭔가 생각하는 듯 한 하나마키 상을 바라본다.
왜 저러는 것일까, 내가 말을 잘못했나, 별의별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데 "너,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 라는 말에 정신이 확 든다.
"...네?“
"오늘 만났을 때 부터 든 생각인데 오이카와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좀 알 것 같다. 메일 주소랑 핸드폰 번호 알려줄래? 단 것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내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며 '뭐 해, 어서 번호 찍어줘?' 하고 재촉하는 듯 한 하나마키상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번호와 메일 주소를 찍어 돌려준다.
"지금 전화 걸 테니깐 이 번호 저장해 놓으면 돼.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어서 못 가지만 다음에 슈크림 맛있는 곳 데려가 줄 테니 먹으러 가자고.“
학식을 다 먹고 나온 뒤 하나마키 상과 헤어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실험까지 남은 시간을 뭘 하고 보낼까 고민하다 중간에 나와 버린 화학 수업이 떠올라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을 다잡고 강의 자료에 집중을 해보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수업을 들었어야 했나보다 싶어 수업 도중에 나왔던 자신의 경솔함을 탓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어차피 수업 시간에 앉아 있어봤자 다른 생각 때문에 집중도 못 했을 테고, 수업 도중에 나오지 않았다면 하나마키상도 못 만났을 거니깐... 하고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금 강의 자료에 집중을 한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강의 자료에 표시해 놓고 도서관 내의 일반화학 책 한 권을 꺼내와 그 부분에 관련된 내용을 두세번 읽다보니 다행히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면 오이카와 상에게 물어볼까, 했었는데 그런 수고는 덜은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복습이라면 복습이라 할 수 있는 공부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잘못하다간 실험 수업에 늦을 만큼 시간이 흘러있었다. 언제 이렇게 정신이 팔렸던 걸까, 하고 재빨리 가방을 싸 도서관에서 뛰어나온다.
다행히 실험 시간에는 늦지 않았지만, 간단한 실험이라 빨리 끝날 줄 알았던 실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 조 실험대 위의 실험기구가 망가졌다는 조교의 말을 듣고는 절망한다. 빨리 끝날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험 늦을까봐 열심히 달렸는데!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어떤 조든 하나라도 실험이 빨리 끝나 그 조의 실험기구를 빌려 실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행히도 빠르게 실험을 끝낸 조가 있어 그 실험대에서 실험을 수행하지만, 다섯 번씩 반복 실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짓누르는지 여러 번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도 정신을 다시금 붙잡고 실험을 진행하다 보니 끝이 오긴 왔다.
실험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긴 뒤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일곱 시가 다 되어간다. 어제 우카이 상과 만날 약속을 잡았으니 뭔가를 사들고 가야하긴 하는데 하고 서둘러 마트를 향하던 때였다. 갑자기 전화가 울려 화면을 보자 [히나타]라는 이름이 보인다. 여보세요-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츠키시마!" 하는 들뜬 목소리가 들린다.
"츠키시마, 츠키시마!“
"...한 번만 말해도 다 알아듣거든...?“
계속되는 실험에 지쳐있던 탓인지 조금 삐딱하게 답이 나갔지만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지 히나타가 기세 좋게 대화를 시작한다.
"카라스노 모임 이후 처음 연락하는 건데, 츠키시마 잘 지내?“
"뭐... 그럭저럭.“
"그 때 다이치 선배 차 타고 같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먼저 출발했대서 아쉬웠어.“
그 말에 아키테루 형의 차를 타고 먼저 올라갔던 것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미안." 하고 답을 한다.
"아니,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손사래를 치는 히나타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다. 그 모습을 생각하며 버스에 올라탄다.
"츠키시마, 지금 어디 가는거야?“
"...응?“
"버스 타는 것 같길래.“
태그하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사소한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 히나타의 감각에 경의를 표할 지경이었다.
"마트에 가려고. 그나저나 너 귀 참 밝다, 내가 버스 탔는지 어떻게 알았어?“
"카드 찍는 소리가 들리길래. 근데 마트는 왜 가는데?“
그 물음에 굳이 숨길 필요도 없고해서 "내일 카라스노로 내려가기로 했거든." 하고 대답한다. 왜 내려 가냐고 묻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래?" 하는 짤막한 반응을 보인 뒤 히나타는 그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엔 우리 학교 놀러 와 줘!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라는 말을 한다.
"나도 만날 수 있고, 다이치 선배도 만날 수 있으니깐. 함께 놀자.“
"그래. 알았어. 이번 주는 바빠서 못 가지만 다음에 시간 나는 대로 놀러갈게.“
그 말에 앗싸! 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 하는 히나타의 탄성이 들린다.
카라스노 모임 이후 여러 일들이 생겨 잊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내 옆에서 조잘대며 활기를 불어넣던 히나타의 모습이 떠올라 지쳐있던 심신이 풀리는 것만 같다.
마트에 도착해 우카이 상에게 줄 레몬 맛 사탕을 집어 든다. 혹시 또 무언가 사갈만한 것이 있을까 하고 선반들을 둘러보는데 딱히 살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계산대로 향한다. 레몬 사탕 하나만 살 거였으면 집 근처 편의점을 갈 걸 괜히 여기까지 왔나 싶다가도 지난 번 우카이 상에게 드렸던 레몬 사탕이 마트에서만 파는 것이었으니깐... 헛걸음은 아니었어,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
하나마키의 전공은 공과대학 기계과인데 일반 화학을 재수강 하느라 있었던 것. 츠키시마와는 다른 분반이지만 수업을 째고 나온 상황이다.
두 사람은 오이카와가 알려줘서 서로가 같은 학교인 것을 알고 있었다.
츠키시마에 대한 하나마키의 관심은 수치로 표현했을 때 4이다. (0이 최하, 9가 최대)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오이카와가 안경군 우리 학교 왔어! 하고 호들갑 떨 때 였다.
=
하나마키 호감도 +3 (대화)
하나마키 현재 호감도 = 7+3 = 10
히나타 호감도 +3 (통화)
히나타 현재 호감도 = 27+3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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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츳키른] 달의 앞면 ▒ 23
꿈 속에서 봤던 기념품점처럼 귀여운 인형들과 수족관 마스코트들 그림이 그려진 수첩, 볼펜 등이 가득하다.
꿈 속 우카이상이 내밀었던 해파리 모양의 모자는 없었지만.
후타쿠치상과 같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건 아니다, 란 생각에 기념품점을 쭉 둘러보는데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다.
"뭐에요?"
"이거 쓰면 귀여울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다 후타쿠치상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진다.
"왜 웃어?!"
물개 모양의 모자를 쓴 후타쿠치상이 미간을 찌푸려 그걸 쫙 펴준다.
"비웃은거 아니니깐 화내지 마세요. 아직 제 모습은 안 봤지만 후타쿠치상이 더 귀여울 것 같아서요."
서로가 쓴 모자와 구석에 놓여져있던 작은 해파리 인형을 손에 쥐고 계산을 하려는데 후타쿠치상이 날 막는다.
"사줄게."
"아녜요, 아까 아침도 사셨는데 이것까지 사게 할 수는 없죠."
"음료만 사주면 된다고 했잖아. 학생한테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달라고 할 리 없잖아."
잊을만하면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는 후타쿠치상의 말에 주춤한 사이 인형과 모자를 빼앗겨버렸다.
계산을 하고 돌아 온 후타쿠치상이 내게 모자를 씌워주고는 "그럼 사진을 찍으러 가볼까?" 하며 싱긋 웃는다.
스티커 사진은 고등학교 시절에 배구부 단체로 찍어보겠다고 난리를 쳤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 작은 화면에 전체가 다 들어갈리 없잖아요?' 하고 한심하단 표정을 짓는 자신과는 달리 모두들 들뜬 표정으로 '스티커 사진이 뭐야, 신기해!', '우왓 이거봐봐 배경도 정할 수 있어', '제한 시간 있나본데?', '모두들 대형을 맞춰서 서 봐, 얼굴 가리지 않게 조심하고-!' 하며 우왕자왕하다 누구 하나 제대로 얼굴이 나오지 못 했었는데.
"화면 보고 웃어야 해!"
후타쿠치상이 입술을 비죽 올리며 웃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나 역시 입꼬리를 끌어 올려본다.
"이번엔 멋있게!"
"이번엔 망가져가면서!"
후타쿠치상의 주문대로 최대한 맞춰보려 애를 써보지만 익숙치 않아 그런지 제대로 했는질 모르겠다.
나온 결과물이 자신 때문에 어색한 것 같다 생각하지만 후타쿠치상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효과 넣어서 꾸며보자-!" 하고 화면을 꾹꾹 눌러가며 이것저것 넣기 시작한다.
나 역시 후타쿠치상이 하듯 이것저것 눌러본다.
"글씨도 쓸 수 있어. 뭔가 써볼래?"
그 말에 두 사람의 이름과 오늘의 날짜를 적어본다.
꾸밀 수 있는 시간이 다 흘렀는지 더 이상 고르지 못 하고 인쇄되어 나온 사진을 받아든다.
서로 색만 다른 물개모양 모자를 쓰고 최대한 즐겁게 웃는 모습의 두 남자,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멋을 내보는 두 남자, 괴상한 표정을 지은 두 남자.
즐거운 순간이 박제가 된 것 마냥 내 손 위에 올려져있다.
"이걸 이렇게, 칼로 잘라서 반 나눠 가지면 돼."
반으로 갈라진 스티커사진을 들고 "어느 쪽을 가질래?" 하고 묻는 후타쿠치상의 두 손을 보다가 "오른쪽이요." 라 말하자 "여기" 하고 넘겨준다.
"찍을 땐 이게 뭐야, 싶지만 나중에 보면 이게 다 추억이 되더라고. 애 같은 짓이라고 선배들이 놀리긴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도 선배들이나 친구, 후배들과도 이런 사진 많이 남겼었거든."
즐겁게 웃는 후타쿠치상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나중에 보여주실래요?" 하고 묻는다.
"후타쿠치상의 사진들 보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과 어떤 시간을 보냈었는지, 어떤 추억을 쌓고 그 안에서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내가 모르는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기념품점을 나와 후타쿠치상과 음료를 마시며 앉아 쉬려고 했지만 수족관 내 매점에서는 병음료, 캔음료 위주로만 판매를 하고 있어 순간 멈칫한다.
아침 식사에 모자, 스티커 사진까지 받은데다 수족관 티켓도 후타쿠치상 덕분에 얻은 것인데 평소에도 알바하며 사마실 수 있는 음료를 사주는 것은 뭔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후타쿠치상만 괜찮다면 근처로 나갈까요?" 하고 말한다.
"난 상관없지만, 너 오후에 수업 있는거 아냐?"
"1시간은 더 있어도 괜찮아요. 자, 어서 나가요."
내가 내민 손을 멀뚱히 바라보던 후타쿠치상이 "...그럼 그러던가." 하고 내 옆을 지나간다.
다행히 수족관 근처에 카페들이 있어 후타쿠치상과 함께 들어가 메뉴판을 바라본다.
뭘 마실까 고민을 하는데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는 후타쿠치상의 말에 나도 모르게 "비싼거 마셔도 되는데..." 하고 중얼거리자 "그거면 됐어." 하고 후타쿠치상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후타쿠치상이 마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내가 마실 따뜻하고 달달한 바닐라라떼를 주문한 뒤 진동벨을 들고 후타쿠치상 앞으로 다가가자 "왜?" 하고 후타쿠치상이 날 올려다본다.
"괜히 저 생각해서 제일 싼 음료 시키신거 아니에요?"
"왜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학생한테 얻어먹기 미안하다 생각해서...후타쿠치상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요."
"그냥 내가 마시고 싶어서 시킨거야. 여기 아메리카노는 다른 곳과는 달리 씁쓸한 정도가 적고 산미가 있지만 깔끔한 뒷맛이 매력적이거든. 거기다 너, 달다구리들 싸왔잖아."
숄더백을 쿡 찌르며 피식하고 웃는 후타쿠치상의 모습을 보고 혹시나 내 자금 사정을 걱정해 일부러 싼 음료를 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사라지는게 느껴진다.
다행이다- 이런 걸로 고민하는 내가 우습지만... 이라 생각하는 도중 진동벨이 울려 "잠시만요." 하고 후타쿠치상에게 말한 뒤 음료를 받아온다.
"여기 라떼아트도 해주네?"
"자주 왔던거 아니었어요? 당연하다는 듯이 이 카페로 들어오길래 많이 마셔본 줄 알았는데-"
내 물음에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후타쿠치상이 입을 연다.
"이렇게 쉬면서 마시는 일이 거의 없으니깐. 보통 일회용 컵에 받아서 나가거든, 빨리 마시고 일에 집중해야 하니깐."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네요, 맘껏 쉬지도 못 하고."
"당연하지, 하지만 쉬는 시간은 있으니깐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지 마."
후타쿠치상의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이라구요?"라 물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웃는다.
"너, 지금 네 표정이 안 보여서 모르나본데 엄청 안쓰러워하는 모습이라 그런 말을 한 내가 더 뻘쭘해 죽을 지경이니깐- 차라리 난 쉬고 싶으면 자체 휴강 때리고 놀 수도 있는 학생이라고 자랑하는 편이 좋다고. 알았어?"
이마를 살짝 툭 치며 후타쿠치상이 말을 이어나간다.
"아, 그리고 이왕이면 라떼아트 흐뜨러트리지 않게 조심해서 마셔봐. 같이 알바하는 여자애들이 하트 모양 받으면 마지막까지 그 모양 흐뜨러트리지 않게 조심스레 마시다가, 한 번에 그 하트모양 넘기면 뭐 사랑이 이뤄진대나 어쩐대나 이러는 말 들어봤거든."
"...이거 나뭇잎 같은데요?"
"나뭇잎도 그렇게 먹으면 뭐 좋은 일 있겠지-"
내가 알 바냐는 식의 말투에 어이가 없어지면서도 후타쿠치상의 말대로 조심스레 머그잔을 들어 라떼 한 모금을 머금는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바닐라라떼가 맛없을 조합이 아니란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 라떼는 정말 맛이 좋네요."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물론 내가 산 것은 아니지만 잘 왔단 생각이 들어."
"여기 바닐라라떼는 마셔 본 거에요?"
"아니, 아메리카노랑 라떼 위주로."
"그럼 한 번 마셔보실래요?"
머그잔을 후타쿠치상 쪽으로 밀자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채 잔을 입에 갖다댄다.
"어때요, 정말 부드럽고 맛있죠?"
"달달하니 맛있네,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자, 여기."
잔을 내게 넘기는 후타쿠치상의 움직임에 맞춰 손을 움직이다 우연히 후타쿠치상의 손등을 스친다.
후타쿠치상의 손등에 내 손이 닿았을 때 순간이었지만 후타쿠치상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이나 행동의 변화는 없었지만 후타쿠치상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을 보자 나 역시 얼굴로 열이 몰려 화끈거리는 것만 같아 일부러 잔을 들어 라떼를 마신다.
혹시라도 후타쿠치상이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하고 물어보면 '따뜻한 커피를 마셨더니 열이 나나봐요-' 하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테니깐.
그치만 후타쿠치상은 내게 그런 물음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내 감정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 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다.
후타쿠치상의 말대로 조심스레 라떼를 다 마신 뒤 맨 위의 나뭇잎 거품을 한 번에 쭉 들이켜본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없잖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후타쿠치상과의 하루를 좀 더 특별히 기억하고 싶단 마음이 강했던 것도 같다.
카페 밖으로 나와 바로 인사를 한 뒤 헤어질까 했지만 "배웅해줄게." 하는 후타쿠치상의 친절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알바 들어가야 하는거 아니에요?"
"뭐야, 나랑 그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어?"
"그게 아니라-"
"아직 시간 남아서 그러는거야, 너무 신경쓰지마."
후타쿠치상의 느긋한 말투에 안심을 하며 버스 줄에 나란히 선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후타쿠치상 덕분에 지난번에 못 봤던 산호관도 둘러보고 이렇게 귀여운 모자도 받고 함께 사진도 찍고."
"나 때문에 수족관 구경 망쳤으니깐 그 정도는 해줘야지."
"...굳이 상기시키지 마세요, 재밌게 놀아놓고는 힘 빠지게-"
"미안해서 그래. 하지만 또 같은 일이 생긴다면 똑같이 행동하겠지 싶고."
"뭐에요 그게."
핀잔을 주면서 눈을 흘기자 "장난이야, 장난." 하고 얼버무리던 후타쿠치상이 "그치만 나 은근히 질투심 있단 말야-" 하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비죽인다.
그 모습이 뭔가 귀여워 보여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자 후타쿠치상이 흠칫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뺀다.
"뭐...뭐야?"
"후타쿠치상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 말투랑 행동 귀여웠다구요-"
후타쿠치상과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헤어졌다 생각했는데 학교로 가는 길이 의외로 막히는 바람에 겨우 출석체크 전에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고 강의자료를 꺼내고 수업을 듣기 시작하는데 평소보다 늦게 들어와 정신이 없어 그런 것일까, 아니면 뒷자리에 앉아서 그런 것일까, 수업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좀 더 여유롭게 나왔으면 이렇게 허둥대며 수업을 듣지 않아도 괜찮을텐데.
하지만 그 생각을 바로 부정한다.
내가 지금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 하는 이유는 이게 아냐.
그저 후타쿠치상과 있는 시간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함께 더 시간을 보내지 못 하는 것이 아쉬워 그런거야-
어거지로 강의실에 들어와 앉아있지만 머리는 계속 후타쿠치상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떠올리고 있으니깐-
그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강의자료가 띄워진 화면을 보던 고개를 숙이고 강의자료에 한 줄을 적어본다.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있었던 후타쿠치상]
늦어- 하고 얼굴을 보자마자 했던 말과는 달리 기다리게 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이유를 붙인 그 배려심
[구미젤리]
단 것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그것과 동등한 어투로 날 신경쓰고 좋아한단 말을 해 '좋아함'이라는 감정의 무게가 다소 가벼운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다가도 사소한 것 하나에도 질투를 하는 그 모습이
"...아이 같아."
피식 웃음이 터지면서 흘러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서둘러 입을 가로막는다.
혹시라도 누가 들었을까 하고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세우고 눈만 움직여 주변을 바라보는데, 다행히 작게 중얼거린 탓인지 아무도 듣지 못 한 것 같다.
어차피 집중도 안 되고 아까 찍었던 스티커 사진도 다시 볼 겸 책상에 지갑을 올린다.
체크카드 기능이 있는 학생증, 지폐 몇 장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다양한 표정과 들뜬 기분이 묻어나는 스티커 사진들이 더해졌단 이유 하나만으로 지갑 안이 화사해진 것만 같다.
=
츳키가 내민 손을 후타쿠치가 무시했던 이유는 손을 잡으면 부끄러워 죽을까봐
=
후타쿠치 호감도 : 기념품점에서의 즐거운 한 때 (+2), 살짝 스친 손과 후타쿠치의 반응 (+2), 버스 정류장에서 느낀 귀여운 모습 (+2)
후타쿠치 현재 호감도 = 24+2+2+2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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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도 울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져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머리맡에 놔뒀던 핸드폰을 확인해보지만 여전히 야마구치의 답문은 오지 않았다.
서운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눌러버리고는 서둘러 씻고 나온다.
후타쿠치상과 만나기 전에 뭘 준비를 하면 좋을까, 하다가 밖으로 나선다.
3월 말인데도 아침이라 그런지 쌀쌀한 기운에 몸을 움츠리며 집 앞 편의점으로 달려간다.
몸을 녹이려 따뜻한 두유 하나와 함께 몇 가지 주전부리를 담아 계산을 한다.
따뜻한 두유를 마시며 편의점을 나선다.
아까보다는 밖이 춥게 느껴지지 않아 느긋하게 걸으며 후타쿠치상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 만나기로 하곤 어디서 몇 시에 만날지 안 정한 것 같아서요. 어디서 볼까요?]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 쯤 [난 언제가도 상관없는데, 넌 어때?] 하는 답이 온다.
몇 시에 어디서 보자! 라는 답이 올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내게 의사를 묻는 후타쿠치상의 행동에 또 한 번 그의 배려심을 느낀다.
[아침 드셨어요?]
[아직. 넌?]
마시고 있는 두유병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잘 됐네요, 아침 같이 먹고 출발할까요?] 라 보낸다.
[그래, 어디서 볼까? 뭐 먹고 싶은거 있어?]
긍정의 답을 보자마자 저번에 쿠로오씨, 코즈메상과 함께 갔던 라멘집의 이름을 대고는 30분 후에 만나자는 약속까지 잡는다.
분명 약속을 잡자마자 나왔는데 30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이게 다 주전부리를 챙긴다고 숄더백을 꺼내려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못 찾아 허둥댄 탓이다.
그래도 우리 집이 후타쿠치상 집보다는 가까우니깐... 하고 마음을 놓았는데, "늦어" 하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다.
"벌써 도착하셨어요?"
"기다리게 하는건 체질에 안 맞아서. 뭐해, 들어가자."
가게 문을 열고 눈짓을 하는 후타쿠치상에게 고마워요- 라 말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뭘 먹을까 하고 고민하다 평소 자주 먹던 소유톤코츠라멘을 시키려 하는데 후타쿠치상 역시 그 메뉴를 고른다.
"신기해요."
"뭐가?"
"입맛이 비슷한 것 같지 않아요? 주먹밥집에서 후타쿠치상이 골랐던 것도 제게 잘 맞는 메뉴였고, 지금 고른 라멘도 그렇고."
"그러네. 단 것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어, 후타쿠치상 단 것 좋아해요?"
"구미젤리 좋아하거든. 껌이나 사탕도 늘 넣어갖고 다녀." 하면서 후타쿠치상이 주머니에서 사탕 몇 알을 꺼낸다.
"너도 단 것 좋아하잖아, 딸기 케이크."
후타쿠치상의 말에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반문하자 "예전에 상점가 지나다가 케이크 먹는 모습 봤었거든."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는거에요? 섬세하시네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
뭐가 인상적이었냐 물으려 하는데 주문한 라멘 두 그릇이 나와 잠시 말을 멈춘다.
"조용하고 아무 것에 관심이 없어보이던 녀석이 행복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먹는게 인상적이었어."
라멘을 반쯤 먹어가던 후타쿠치상이 지나가는 말처럼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을 말한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하고 지나쳤었는데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혀버린거야."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면서 후타쿠치상이 날 바라본다.
"이후엔 세죠전에서의 네 활약을 보고 완전히 빠져버린거지만."
생각보다 오랫동안 내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데 "잠깐 화장실 좀" 하고 후타쿠치상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행이다 싶어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 화면이 점멸하는 것이 보여 고개를 다시 숙인다.
[미안, 츳키. 어제 일찍 골아떨어지는 바람에 이제야 문자 봤어]
[화난건 아니지...? 츳키, 정말 미안ㅠ]
[츳키, 츳키, 이번 주말에 우리 만나기로 했던거 기억하지...ㅠ? 그 때 내가 맛있는거 쏠게ㅜㅜ]
연속으로 세 통이나 메시지를 보낸 야마구치의 행동에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10시도 되기 전에 잠에 빠졌던 것일까.
잘 자고 일어나서 내 문자가 왔단 걸 알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답문을 보냈을 야마구치를 상상하자 내가 아는 야마구치 타다시가 맞단 생각이 든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예전만큼 얘기도 자주 하지 못 하지만 야마구치가 변한 것은 아니다.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너무 놔주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일부러 답을 보내지 않고 핸드폰 메시지 화면만 바라본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어느새 자리에 돌아온 후타쿠치상이 날 바라보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친구?"
"네, 야마구치요."
"정말 친한가보네"
"네?"
"너 지금 표정이 어떤 줄 알아?"
"...어떤...데요..?"
"마치 케이크를 앞에 두고 싱글거리는 모습, 그 자체야."
그 말에 카메라를 켜 내 얼굴을 확인한다.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을 보고 나서야 후타쿠치상의 말을 이해한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깐 조금은 샘이 나네."
"문자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샘내고 후타쿠치상 속이 좁네요?"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랑 문자 주고 받는걸 보고 좋아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냐?"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튀어나오는 후타쿠치상의 말에 비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국물 한 숟가락을 뜨려는데 "주문하신 구운 주먹밥입니다." 하며 주인 아저씨가 접시를 내민다.
영문을 몰라 주먹밥 접시만 바라보는데 "안 받고 뭐해?" 하고 후타쿠치상이 접시를 받아 탁자 위에 놓는다.
"라멘만 먹기엔 아쉬워서 더 시켰어. 어제도 주먹밥 먹었지만 괜찮지?"
"...언제 시키셨어요?"
"아까. 어서 먹어봐."
내 쪽으로 접시를 미는 후타쿠치상의 사소한 행동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식사를 다 마치고는 내 몫의 돈을 내려 하는데 "계산 다 했으니깐 나와." 하고 후타쿠치상이 문을 열어준다.
무슨 말인가 싶어 주인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까 저 쪽이 계산 했어요." 라 대답한다.
후타쿠치상을 따라 나가며 "언제 계산한거에요, 아니 제 것까지 계산한거에요?" 라 묻자 "그냥 사줘서 고맙다고 말하면 되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하며 후타쿠치상이 눈썹을 살짝 찌푸린다.
"아... 네, 일단... 고마워요."
"일단이 뭐야, 일단이."
이마를 콕 찌른 후타쿠치상이 "대신 수족관에서 마실 것 사주기다?" 하고 웃는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자마자 시간을 딱 맞춰 버스가 도착한다.
"매번 기다려야 버스가 오더니 오늘은 왜 바로 들어오지?"
지갑을 잠바 안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리는 후타쿠치상에게 "제가 있어서 그래요." 라 툭 던져놓고 뭔가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자리에 앉는다.
"그래, 네 덕분이야."
뭐가 너 때문이냐고 놀리듯 말할거라 예상했지만 그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며 내 옆자리에 앉는 후타쿠치상을 바라본다.
"왜?"
"...후타쿠치상 원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럼 내가 맨날 말꼬투리만 잡고 늘어지는 줄 알았어?"
콧방귀를 뀌며 창밖을 바라보는 후타쿠치상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창밖을 바라본다.
"매번 버스를 탈 때마다 혼자 바깥 풍경을 봤었어. 어지간하면 서서 가고, 정말 힘들 땐 맨 뒷좌석에 틀어박히듯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도로를 달리는 차도 보고. 저 사람들은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것일까, 저 사람들도 힘든 하루를 보내겠지? 모두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하는 걸까? 그런 질문을 계속 해댔었어. 하지만..."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후타쿠치상으로 돌렸을 때 그가 빙긋 웃으며 꺼낸 말에 잠깐이지 두근거림을 느낀 것도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깐 저렇게 살아가는 거다. 라고 결론을 내리니깐 마음이 편해졌어. 나한텐 그런 사람이 너고."
후타쿠치상의 말에 뭐라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라 손만 꼭 쥐고 있다가 가지고 온 주전부리가 생각나 가방을 연다.
"후타쿠치상도 단 것 좋아한다고 하셨죠? 마침 달콤한 주전부리들 사왔는데 좀 드실래요?" 하고 손에 잡히는 것을 꺼내든다.
"우와, 구미젤리?"
그러고보니 구미젤리 좋아한다고 그랬지, 하고 라멘집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수족관 오가는 길에 입이 심심할까봐 이것저것 사봤는데- 우연히 후타쿠치상이 좋아하는거였네요."
"그러네. 신기하다. 내가 뜯어도 될까?"
후타쿠치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 같이 웃으며 후타쿠치상이 구미젤리의 포장 봉지를 쭉 뜯는다.
그러더니 빨간 젤리를 집어 내 입 앞에 갖다댄다.
당황스러운 그 행동에 "...뭐...뭐에요?" 라 말하자 "네가 사왔으니깐 네가 먼저 먹어봐야지.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 하고 후타쿠치상이 해맑게 웃는다.
"자...잘 먹을게요."
내가 사와놓고나선 뭘 잘 먹을게요 인거야? 속으로 그런 말을 외치면서도 후타쿠치상이 내민 젤리를 입 안으로 넣는다.
"그럼 이제 나도 먹어볼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안에 젤리를 서너개 던져 넣는 후타쿠치상의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
분명 어제 영화를 볼 때 까지만 해도 조금은 어색했던 것 같은데 계속 부딪히며 색다른 모습들을 봐서 그런지 점점 편해진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요."
"응?"
"아녜요."
이렇게 하나씩 모르는 것을 알아가며 상대와의 추억을 채워나가는 것이 생각보다 즐겁단 것을 하루하루 알아가는 것 같다.
수족관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부터 볼까요?" 하는 내 물음에 후타쿠치상이 "네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괜찮아." 라 대답한다.
기왕 내게 선택권이 온 김에 지난 번 우카이상과 왔을 때 못 봤던 관 위주로 보는게 낫겠단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관이 다 예쁘고 아름다웠지만 산호관이 정말 신기했다.
상아색으로 삐죽삐죽하게 나와있는게 끝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다양한 색과 모양을 뽐내는 광경에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마음에 들어?"
"네... 정말 환상적이에요, 이렇게나 다양한 산호가 있는지 몰랐는데... 모여있으니 너무 예뻐요."
"그치? 나도 이 앞을 지나갈 때 마다 예쁘단 생각하거든."
산호 수조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후타쿠치상을 바라본다.
후타쿠치상의 두 눈이 눈 앞의 광경을 가득 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부러워요."
"뭐가?"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늘 볼 수 있는 후타쿠치상이요. 물론 일하는게 힘들거란 것도 잘 알아요, 그치만 그냥... 이런 공간에 있을 수 있단 사실이 부러워요. 꿈만 같은 세상이잖아요."
"흠, 그렇게 생각하면 일할 때 좀 더 즐겁겠다. 남들이 못 누리는 동화속 세상에 내가 들어와있다고 생각하면."
현실도 모르고 그런 속 좋은 말한단 핀잔 대신 내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후타쿠치상의 말에 더 행복해진다.
조금씩 흔들리는 감정의 흐름에서 후타쿠치상의 옆얼굴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다.
날카로운것 같으면서도 동그란 눈, 살짝 다문 입술.
곧게 뻗은 목선을 따라 나보다 더 탄탄하게 잘 발달한 팔까지 훑지만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 한 것인지 후타쿠치상은 여전히 산호수조를 바라보고 있다.
날 좋아한다면서 내 앞에서 다른 것을 황홀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싫다.
야마구치의 문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샘이 난다던 후타쿠치상의 말이 이해가 가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산호에 정신이 팔린 후타쿠치상의 팔을 붙잡고 내 쪽으로 후타쿠치상의 시선을 돌린다.
얼떨떨한 표정의 후타쿠치상에게 "이제 그만 나가요." 라 말하며 돌아선다.
"아직 안 본 관들도 있는데...?"
"괜찮아요, 꼭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기념품점도 안 갔잖아."
후타쿠치상의 말에 걸음을 멈춘다.
"저번에도 그냥 나가느라 못 가지 않았어? 이왕 온 김에 기념품점도 구경해야지. 귀여운 것들도 많고 스티커사진도 찍을 수 있어. 애 같다고 넌 싫어할수도 있지만 난 너랑 같이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건 아니에요-" 하고 말을 막는다.
"싫지 않아요, 오히려 가고 싶어요. 그치만..."
그치만 후타쿠치상이 계속 산호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깐-! 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그럼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 난 그저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어 더 주의깊게 본거였는데-"
엇비슷한 키라 그런지 후타쿠치상의 떨리는 숨소리마저 날 감싸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온 몸을 후타쿠치상에게 맡긴 채 "그래도 날 더 바라봐달라구요-" 하는 어리광을 부리며 내 허리를 감싼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갠다.
=
후타쿠치 호감도 : 츠키시마가 단 것을 좋아한다, 라는 사실을 알고 기억까지 하는 것 (+4), 내 쪽으로 접시를 밀어준 고마움 (+2), 버스 안에서의 대화 (+3),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어서 그런거야, 라는 말에 감동 (+3)
후타쿠치 현재 호감도 = 12+4+2+3+3 = 24
야마구치 호감도 : 연속으로 세 통이나 메시지를 보내 옴 (+3)
야마구치 현재 호감도 = 18+3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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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밤이라 그런지 영화관 내에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후타쿠치상과 나란히 앉아 본 영화는 그럭저럭 볼 만 했었다.
다만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 때 문득 '영화가 끝나면 뭘 해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 집중력이 흐뜨러졌었다.
엔노시타 선배와 보내기로 했던 시간을 달라 말해놓고 나서는 굳이 함께 있지 않아도 할 수 있을 영화 관람을, 그것도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 후타쿠치상이 먼저 제안한 행동이었으니 뭔가 아닌 것만 같았다.
영화가 끝나면 열한시 반은 될텐데... 하고 시간을 따져가며 여러 선택지를 생각해보는 사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다행히도 후타쿠치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마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영화관 직원들이 불을 켜고 들어와 청소를 시작할 때 쯤 나가는 스타일인 듯 싶다.
그 점은 나와 맞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귀엣말로 "후타쿠치상도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앉아있네요?" 하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이런 식으로 웃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아냥거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 뿐이었고, 건들건들하며 대충 일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도 더 착실한게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알던 사람들 중 제일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정적이 흐르던 그 때 후타쿠치상이 먼저 말을 건다.
"벌써 열한 시 반이네. 내일 수업은 몇 시 부터 있어?"
"아홉 시에 있어요."
"뭐야 그럼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자야하는거 아냐?"
놀라며 묻는 후타쿠치상의 말에 "괜찮아요." 하고 대답한다.
"제가 먼저 후타쿠치상에게 함께 시간 보내자고 말한거잖아요. 그러니깐... 후타쿠치상만 괜찮으시다면 같이 산책 할래요?"
"늦었잖아."
짧은 말이지만 타박을 한다기보다는 얼러주는 것 같은 모양새에 "걱정해주시는거에요?" 하고 묻는다.
"따지고 보면 걱정이지. 내일 일찍 나가야하는데 늦게까지 붙잡은 것 같잖아. 너도 쉬어야 할테고."
"그치만-"
그치만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입술을 적시며 말을 고르고 골라본다.
"후타쿠치상을 좀 더 알고 싶어요."
영화가 끝날 때부터 들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갑작스런 나의 말에 놀란 것인지 후타쿠치상이 멈춰선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다시금 말을 정리해본다.
"지금까지 제가 알던 후타쿠치상은 정말 겉껍데기 뿐이었단걸 알았어요. 오늘 잠깐이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좋은 쪽으로 다르단걸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좀 더 얘기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말들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횡설수설하고 있단 것을 내 자신조차 알겠는데 후타쿠치상이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과 함께 "좋게 봐주고 있다니 다행이네."라 말해준 덕에 긴장이 풀린다.
"하지만 산책은 안 돼. 내일 수업에 지장가게 하는 건 그닥이야. 이래봐도 나 꽤 착실한 사람이고 남한테 피해 끼치는 것 싫어하거든."
단호한 후타쿠치상의 말에 "...그건 그렇지만-" 하고 뒷말을 어떻게 이어나갈까 고민하는데 "대신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하는 말을 듣는다.
"어차피 시간 늦어서 버스 타기도 애매할 것 아냐. 같이 걸어가줄게."
날이 어둡다.
가로등이 길 중간에 있긴 하지만 수명이 다 한 것인지 불빛이 약하다.
"이 쪽으로 가면 되는거야?"
후타쿠치상이 몸을 돌린 방향이 맞아 "네 그 쪽으로 가면 되요. 근데 어떻게...?" 하고 묻자 "우리 집도 이 쪽이거든." 이라 대답한다.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 없이 계속 앞만 보고 걷는 후타쿠치상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같이 걸어가준다고 해놓고선 일렬로 걷는 건 대체 뭘까 싶어 "저기, 후타쿠치상-" 하고 이름을 부른다.
날 향해 고개만 살짝 돌린 후타쿠치상은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내게 호감을 표한 다른 사람들처럼 따뜻한 말을 한다거나 스킨십을 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점이 신선하고 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배려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착실하고 남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계속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이 걷기로 했으면서 먼저 가면 어째요?"
그 마음을 조금 흔들어보고 싶다.
"같이 걸어요."
일부러 팔을 크게 움직여 서로의 손등이 살짝 부딪히게 한다.
움찔하는 후타쿠치상의 옆모습에서 동요가 느껴진다.
대화는 다시금 끊겼지만 나란히 걷기 때문인지 아까보단 편안한 기분이 든다.
앞장 서서 걷던 때와는 달리 내 보폭과 맞춰가며 걷는 후타쿠치상의 배려심 역시 그 기분을 고조시킨다.
의외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후타쿠치상에게 흥미가 생긴다.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감정 표현도 확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본 그의 모습은 조금 색다르다.
그래서일까, 타인에게 관심을 그닥 갖지 않는 내가 '알고 싶다'는 말을 하고 그에게 더 다가가려는 것이?
한 걸음씩 옮기면 옮길수록 집이 가까워져 온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집 앞 편의점이 보일 것이고, '집 바로 앞이에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라는 인사와 함께 헤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가 않다.
친해졌다는 느낌이 들지도, 많은 말도 하지 않았는데 헤어짐이 아쉽다고 느끼게 될 줄은 몰랐었다.
"후타쿠치상-"
내 목소리에 후타쿠치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내일이 몇 일이죠?"
뜬금없는 내 물음에 날 멍하니 바라보던 후타쿠치상이 핸드폰을 보더니 "26일인데?" 하고 말한다.
"저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난 사실이 있어요. 26일 수업 휴강이라고 수업 첫 날부터 교수님이 얘기하셨었는데."
나도 모르게 술술 거짓말이 흘러나온다.
이런 돌발 행동을 할 줄 몰랐는데 내 자신을 멈출 수 없다.
"내일 오전 수업 없는데, 후타쿠치상만 괜찮다면 수족관 놀러가도 될까요?"
방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심장이 미친듯이 빠르게 뛰고 있단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엔 아무렇지 않게 수업이 없다 거짓말을 하고 만나자는 약속까지 해놓고 나서, 일을 다 저지르고 난 지금에야 떨리는건 뭐람-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냉장고로 가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신다.
갑작스런 자신의 말에 후타쿠치상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난 괜찮아-" 하고 작게 중얼거렸었다.
"내일은 오후 타임이라 점심까진 시간이 남긴 해."
"그럼 오전에 함께 구경해요. 후타쿠치상 수족관에서 일한다고는 해도 맘 놓고 감상한 적은 없었죠?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면 느낌이 다를거에요, 거기다가-"
저랑 함께 보면 더 색다르지 않을까요?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저번에 같이 보자고 말했으니깐 같이 가요." 하고 말을 마무리를 했던 기억까지는 있다.
하지만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걸까."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내 목소리만이 울려 귀에 꽂힌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열흘 동안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나도, 그런 내 주변 역시 평소와 다른 것도 모두 다.
복잡해진 머리를 긁으며 이대로 잠이나 자버려야지, 하고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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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츳키른] 달의 앞면 ▒ 20-1 (후타쿠치 시점)
* 달의 앞면 20-1화는 20화와 같은 시간으로 진행된 이야기를 후타쿠치 시점에서 풀어낸 화입니다.
[미안, 후타쿠치 나 못 갈 것 같아.]
수족관에서 세 발자국 걷자마자 본 문자는 참으로도 힘이 빠지는 말이었다.
"뭐야! 일부러 약속 시간에 맞추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더니!"
입으로는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어디가 아픈가, 차가 끊겼나- 하면서 서둘러 전화 버튼을 누른다.
"왜 안 받는 거야..."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을 때, "후타쿠치-" 하는 치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어? 왜 못 오는거야?"
"아니, 그게... 올라오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뭐?"
"분명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안 보이는거야. 돈이야 뭐 잃어버려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카드는 좀... 그렇잖아?"
어색한 듯 한 미소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야, 너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놓고 다니길래!"
"화내지마. 너 만날 생각에 들떠서 잃어버린거라 생각하면 좀 긍정적이지 않아?"
이런 때 잘도 그런 말이 나온다, 하고 한숨을 쉬자 "뭐 어때, 이렇게라도 생각해야지." 하며 치카라가 웃는다.
"혹시 모르니깐 집에 가서 한 번 뒤져보게. 안 들고 나왔던 걸지도 모르니깐."
"그래, 차라리 네가 놓고 나온거였음 좋겠다. 도착하면 연락해."
"응, 알았어. 오늘은 미안."
"괜찮아, 나중에 지갑 꼭 찾고 한 턱 거하게 쏘기나 해."
"그래그래, 고맙다."
그나마 큰 일이 아닌 것이 다행이다.
어디 다쳤거나 아픈 것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마음이 편해짐과 동시에 그럼 난 이제 뭘 하면 좋지, 하며 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
치카라를 만날 생각에 딱히 음식 재료들도 사놓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도 먹을 것이 없다.
발이 이끄는대로 가다보니 길을 지나가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주먹밥집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나 들어가볼까, 하고 문고리를 잡을 때 기다리던 치카라의 연락이 온다.
"치카라? 지갑은 어떻게 됐어?"
"다행인 소식이랑 아닌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살짝 웃음기가 나는 것이 지갑을 찾은 모양이다 싶어 마음 편하게 묻는다.
"다행인 것부터?"
"지갑을 찾았어. 대신 안 좋은 소식은..."
"뭔데?"
"...집에 두고 나갔더라고."
"...뭐?"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다.
아예 들고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그런거야?
"화났어?"
"그럴 힘도 없다.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야."
"나라고 그러려고 그런게 아니라고. 당연히 들고 나온 줄 알고 있다가 안 보이니깐-"
"알았어, 알았어."
화 낼 건덕지도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라, 아직 밖이야?"
"네 덕분에 저녁 준비를 하나도 못 해서 뭐 좀 사먹으려고."
"그래? 어디로 갔는데?"
"주먹밥집."
"지금쯤이면 꽤 배고플 시간일 것 같은데. 두 개는 먹어야겠다."
"그래야지. 일단 하나는 기본 주먹밥을 시키고, 나머지 하나는 뭐가 좋을까."
"구운 명란 어때? 전에 사먹어 봤는데 맛있더라고. 그럼 너 밥 먹어야하니깐 문자로 연락할까?"
"그래."
그렇게 치카라가 골라준 주먹밥과 기본 주먹밥, 장국을 시키고는 이왕 먹는 김에 뭐 하나 더 먹을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였다.
"...후타쿠치상?"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목소리에 놀라 "츠키시마?" 하고 이름을 부른다.
엔노시타를 만나지 못 했던 것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기 그지없다.
아까까지만 해도 치카라와 만날 수 없게 된 것이 그렇게나 아쉬웠는데 옆에 츠키시마가 앉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아쉬움이 사그라드는 것이.
거기다 치카라를 골려줄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단 사실이 즐겁다.
[치카라, 지금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지 맞춰볼래?]
[혼자 간 거 아니었어?]
[혼자 갔는데 누군갈 만났어. 누구일 것 같아?]
[네가 그렇게 묻는단건 나도 아는 사람이란 뜻인데.]
[네가 알고말고. 오히려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걸?]
[누군데 그래?]
[츠키시마 케이]
그렇게 문자를 보내놓고 나서 츠키시마를 바라본다.
엔노시타와 메시지를 주고 받느라 대충 대화를 해서 그런가 츠키시마의 표정이 조금은 굳어있는 것 같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거야, 내가 더 긴장이 되는데-
조금이라도 얼어있는 분위기를 깨보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어젠 잘 들어갔어?" 하는 물음이 튀어나온다.
"네?"
"어제 만났었잖아, 아오바죠사이 주장이었던 오이카와 토오루."
망했다.
왜 하필 말을 꺼내도 이 말을 꺼냈지?
분위기를 더 망쳐버렸잖아!
하지만 이제 와서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제 그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츠키시마에게 말을 걸었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사이길래 함께 수목원에 놀러온 거지? 그것도 평일에? 너 수업은 어쩌고?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기에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오이카와 토오루랑 친해?"
그 말에 츠키시마가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축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쉴새없이 울리는 핸드폰에 신경이 쓰인다.
[츠키시마라고?]
[후타쿠치, 지금 있는 곳 어디야?]
[야, 뭐야 너 왜 연락 안 받아?]
[너 분명 저번에만 해도 나보고 놓지 말라고 했다, 기억 안 나?]
좋아하기에 놓아주겠다느니 별 시덥지 않은 말을 내뱉어 놓고선 실제로는 이렇게나 집착하고 흥분하는 건 또 뭐야.
지금까지 치카라의 이런 돌발적 행동이랄까, 좀 격하게 나오는 행동은 모두 츠키시마와 관련된다는 것을 떠올리자 또 한 번 할 말을 잃는다.
"답답하네-"
다른 것에도 이렇게 집착 좀 해보지 그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기분이 꼬인다.
나만 있었을 땐 올라온다고도 안 하고선.
[주먹밥집이라고. 너 이제 와서 올라와봤자 우린 다 먹고 나가있을걸?]
-
밥을 먹으면서 좀 더 친해질 거리가 없을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결국 치카라 얘기만 하다 끝나버렸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하지만 케이크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라는 말도, 나도 단 음식 좋아하는데 같이 먹을까? 하는 권유도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츠키시마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틱틱 거리는 말투가 나온다거나 하고 싶은 정반대의 말이 나온다.
결국 이대로 헤어지는건가 하고 돌아섰는데-
내 어깨를 붙잡고 "엔노시타 선배랑 만나기로 했던 시간을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라 했을 때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이대로 쓰러져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
영화를 보러가자 말한 것은 나였지만 정작 요즘 무슨 영화를 하는지도 몰랐다.
워낙 알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데다 영화는 그리 자주 보지 않았으니깐.
그래서 여러 영화들 이름을 보며 뭘 봐야 좋은 경험을 남길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 큰 남자 둘이 로맨스를 보는 건 뭔가 이상한 시선을 받을 것 같고, 애니메이션을 보자니 앞 내용도 모른 채 보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이고...
대충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니 SF 영화 하나를 고르는 것 같아 적당히 알맞은 자리를 찾아 예매를 한다.
마음 같아선 팝콘 콤보 세트를 사 함께 나눠먹으며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었지만 뭔가 낯뜨거운 기분에 아무 것도 사지 않은 채 덜렁덜렁 들어갔다.
그리고 그건 차라리 잘 한 선택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 앉아 슬쩍 옆을 봤을 때, 다른 영화 예고편과 광고마저도 집중해서 보는 츠키시마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 영화가 시작되는지도 몰랐다.
영화는 생각보다 재밌었다.
옆에 츠키시마가 앉아있기에 더 재밌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재밌었던건지, 아니면 내 마음이 들떠서 즐겁게 느껴졌던 것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츠키시마를 바라보며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신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라도 믿을테니 제발 이 시간이 영원토록 지속되게 해주세요.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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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츳키른] 달의 앞면 ▒ 20
집에 왔을 땐 그렇게 음식이 당기지 않았는데 막상 여덟시가 되어가니 허기가 진다.
뭔가를 해먹을까 했지만 솜씨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보니 밖에서 뭔가 간단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어 옷을 챙겨 입는다.
3월이지만 밤엔 쌀쌀할 때도 있어 얇은 가디건 하나를 걸친 뒤 자주 가는 주먹밥 집을 향한다.
어떤 주먹밥을 먹을까, 하고 고민하며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구운 명란 하나랑 기본 하나랑 장국이랑... 아 잠깐만요- 뭐 하나 더 시킬까...?" 하고 주문을 하는 금발머리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딘지 낯익은 목소리에 혹시나 하고 "...후타쿠치상?" 이라 부르자 "츠키시마?" 하고 후타쿠치상이 뒤를 돌아본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
이왕 만난 김에 같이 앉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후타쿠치상의 옆자리에 앉는다.
지금 들어 온 주먹밥집은 가게 자체가 작긴 하지만 주방을 둘러싼 바 형식으로 여덟 명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어 아기자기한 맛이 난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 후타쿠치상과 같은 메뉴를 시킨 뒤 "오늘 알바는 끝나신 거 에요?" 하고 묻는다.
"어. 알바 끝나고 약속이 있었는데 지금 파토가 나서 뭐 먹을까 고민하다 여기 들어와 본거야. 넌?"
"저요?"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저녁 먹어?"
"아뇨, 원래는 안 먹으려다가 과제 마치고 나니깐 허기가 져서 나온 거에요."
"흐응,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시키지 않고 핸드폰을 보며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하는 후타쿠치상의 살짝 냉랭한 태도에 말을 붙이지 못 하게 된다.
조금 어색한 감이 들어 차라리 주먹밥을 포장해 갈 것을 그랬나,,, 하고 후회를 할 때였다.
"어젠 잘 들어갔어?"
갑작스런 물음에 "네?" 하고 묻자 "어제 만났었잖아, 아오바죠사이 주장이었던 오이카와 토오루." 하고 날 똑바로 바라보며 후타쿠치상이 묻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수목원에서 후타쿠치상을 만났던 것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후타쿠치상이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오르면서 대답이 바로 나가지 못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랑 친해?"
그 물음에도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하다기에는 친한 선후배 이상의 감정이 오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사이냐 묻는다면 답이 궁해진다.
어떤 말도 하지 않는 내게 "답답하네-" 하며 후타쿠치상이 다시 핸드폰을 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 약속이 파토 났다고 했잖아."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후타쿠치상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자 "지금 문자하고 있거든, 그 녀석이랑." 하고 후타쿠치상이 날 다시 한 번 빤히 바라본다.
"누군지 궁금해?"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누군지 물어봐주길 원한다는 말과 동격인 것 같아 "누군데요?" 하고 묻는다.
"엔노시타야."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후타쿠치상의 입에서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엔노시타 선배요?" 하고 되묻는다.
"그래, 지금 네 얘기도 했더니 아쉬워하네. 약속 괜히 깼다고."
곧은 입술을 왼쪽으로 살짝 올리는 후타쿠치상을 바라보며 "두 분 친하셨어요?" 하고 묻자 "너랑 오이카와 정도로 친할지도." 라는 대답이 나온다.
"같이 문자 주고받고 어쩔 땐 만나기도 하는 그런 사이. 딱히 옆에 없어도 상관없지만 막상 연락이 안 되면 걱정이 좀 되는?"
씨익 웃으며 다시 화면을 바라보는 후타쿠치상을 보며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렇게 생각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라 생각하다 '아냐, 있었는데가 아니고 있는데, 라고.' 하며 머리를 살짝 좌우로 흔든다.
[잘 지내고 있어?]
뭔가 더 괜찮은 말들이 많을텐데 막상 문자를 보내려니 떠오르는 말이 없어 저렇게 보내버린다.
졸업 전까지만 하더라도 늘 붙어 다녀서 문자를 보낼 일도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익숙지 않은 행동을 할 때마다 나와 야마구치 간의 거리가 실감이 난다.
"너도 문자? 누구한테 하는 거야?"
날 힐끔 바라 본 뒤 주먹밥을 베어 무는 후타쿠치상에게 "친구한테요." 하고 말하며 화면을 바라본다.
카라스노 모임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바빠서인 것일까 이번에도 야마구치의 답문자가 바로 오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내려놓고 장국을 떠먹는데 "대학 친구한테 보낸 거?" 하고 후타쿠치상이 묻는다.
"아뇨, 고향 친구한테요."
"아, 그 주근깨 있는 친구?"
한 번에 야마구치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 순수하게 놀라워 "잘 아시네요?" 라 말하며 그를 바라본다.
"시합을 같이 뛰었던 학교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억하는 편이거든. 거기다 엔노시타랑 말하다 보면 너네 얘기가 나올 때도 있고 해서."
=
음식을 다 먹고 밖으로 나올 때 까지도 야마구치의 답변이 오지 않아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앞선다.
바빠서 그럴 거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아는 야마구치와는 다르단 것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늘 나를 우선순위에 넣고 행동했었는데 점차 내 순위가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
주말에 같이 만나자고 했지만 이것마저도 혹시 다른 일정에 밀려버리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 같다.
기분이 다운되고 있는데 후타쿠치상이 내 쪽으로 돌아서며 묻는다.
"벌써 아홉시가 되어가네. 츠키시마는 여기서 집 가까워?"
"네, 가까운 편이에요. 후타쿠치상은..."
"난 세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내일도 수업 있지?"
"네, 후타쿠치상도 알바 있죠?"
고개를 끄덕이는 후타쿠치상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의외로 성실하시네요." 라는 실례되는 말을 해버렸다.
"뭐야, 그거. 나한테 시비거는 거?"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 후타쿠치상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입을 뚫고 나온 말이 뭐였는지를 인식한다.
자신도 모르게 엔노시타 선배와 편하게 문자를 주고 받으며 친하게 지내는 후타쿠치상을 질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난 복잡한 인간관계에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제일 신뢰하는 친구에게서 답문자도 바로 받지 못 하는데 후타쿠치상은 나와는 정반대로 타학교여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고, 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후타쿠치상에게 발끈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한몫한 것이 아닐까?
가볍게 말하는 것 같지만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내리 꽂는 것이 부러워 나도 모르게 꼬인 행동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린 아이 같이 행동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저기... 죄송해요, 후타쿠치상.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내 외양만 봤을 땐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깐."
화를 내지 않을까 생각한 것과는 달리 후타쿠치상은 가볍게 웃어넘긴다.
"수족관 알바 면접 보러 갔을 때도 들은 말이었는데 뭐. 불성실해 보이는데 정말 평일 근무 잘 하실 수 있겠어요? 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하지만, 하면서 후타쿠치상이 발걸음을 뗀다.
"지금은 모두가 내 성실함 하나는 인정해 줘. 출근 시간은 꼭 지키려고 노력하고 딴 짓은 최소화하려하고. 먼저 나서서 일을 하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일까지도 도맡아서 하고."
"...그렇게까지 하면 힘들지 않아요?"
"너도 엔노시타와 같은 말을 하네. 역시 닮았어."
그 말에 "네?" 하고 반문을 하지만 내 말에 대한 답변 대신 후타쿠치상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이어나간다.
"나도 사람인 이상 힘이 들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고, 근무 시간 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은 마음 나라고 없겠어? 그래도 내게 맡겨진 일은 다 하고 싶어. 거기다 날 외양만으로 판단한 사람들의 콧대를 꺾어 주고 싶거든. 그러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코트에 들어가기 전 몸을 풀듯이 팔을 빙빙 돌리는 후타쿠치상을 보며 저 사람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말이 길었네. 여튼 오늘 반가웠어."
손을 살짝 흔들면서 인사를 하고 멀어지려는 후타쿠치상의 어깨를 나도 모르게 붙잡는다.
"잠깐만요, 후타쿠치상."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것인지 후타쿠치상의 눈이 더 동그랗게 떠진다.
"후타쿠치상만 괜찮다면, 오늘 엔노시타 선배랑 만나기로 했던 시간을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
얼결에 후타쿠치상을 붙잡긴 했지만 딱히 무엇을 하고 싶어서 라거나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라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래" 하고 대답한 그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잠시 생각을 했다.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기에 후타쿠치상이 뭘 관심 있어 하는지도 몰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주름 생겨. 쫙 펴." 하면서 후타쿠치상이 내 이마를 살짝 친다.
"뭐 때문에 그렇게 인상을 쓰는 거야?"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뭐야, 붙잡아 놓고는 뭘 할지 생각도 안 해둔거야?"
재밌다는 듯이 웃는 후타쿠치상의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보기 좋다.
스스럼없이 감정 표현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복인지 저 사람은 알까?
"흠, 그럼 같이 생각해보자. 같이 할 만한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생각을 하는 후타쿠치상에게 '입술 그렇게 내미니깐 오리 같아요.' 하고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란 생각에 입을 다문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면 상점 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미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는 무리다.
남은 선택지는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건데, 술을 마셨다간 오늘 있었던 복잡한 일들이 터져 나와 후타쿠치상을 당혹케 할 것만 같았다.
결국 영화인가, 하고 후타쿠치상을 바라보는데 "영화 괜찮아?" 하고 그가 먼저 입을 뗀다.
"붙잡은건 넌데 왜 내가 뭘 할지 고른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괜찮아요,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니깐요. 마음이 통했나봐요."
"쓰...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먼저 홱 돌아서서 "안 따라오면 두고 갈거니깐 알아서 따라와!" 하고 말하는 후타쿠치상의 얼굴이 좀 붉어진 것처럼 보이는건 기분 탓이었을까?
여기서 손이라도 잡았다간 후타쿠치상의 얼굴이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 한 것처럼 달려간다.
"너무해요,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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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내달리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헛디뎠다.
하지만 다행히 중심을 잃지 않아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쿠로오씨가 여전히 내 뒤를 쫓았을까 하고 살짝 뒤를 돌아봤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안도하는 한편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에 숨을 크게 들이마쉰다.
이대로 수업을 들어가봤자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게 당연하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홀로 집에 있으면 지금 내가 쿠로오씨를 밀치고 나온 행동을 반추하며 왜 밀쳤는가부터 시작해 왜 쿠로오씨 집에 간 것일까, 옷은 왜 빌렸지? 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책할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멍하게 있더라도 학교로 가 사람들을 부딪히다 보면 조금이라도 잡생각을 떨치지 않을까 싶어 학교에 가기로 마음 먹는다.
가방은 물론이고 펜 하나도 들고 나오지 않았지만 이대로 집에 들어갔다간 긴장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아 아예 학교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교재야 사물함에 있고, 노트와 펜은 주변에서 빌리면 되니깐...
=
어떤 정신으로 수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동기에게 A4 용지 몇 장과 샤프를 빌려 교수님께서 필기하시는 내용을 기계적으로 받아적긴 했지만 아무 것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
남들이 보면 열심히 수업을 듣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손을 마구 움직인 것 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해."
수업도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멍하니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탁 치며 말을 건다.
"얏호, 케이쨩! 수업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아 "오이카와상...?" 하고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돌린다.
"집에 안 가고 왜 멍하게 서있어? 혹시 집에 들어가기 싫은거야?"
어제 데이트가 카게야마의 통화 이후 흐지부지 끝났던 것이 떠올랐지만 오이카와상이 평소와 다름없는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줘서 그런지 긴장이 탁 풀리는 것만 같다.
"케이쨩?"
말을 해야하는데 목이 탁 막힌 것 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츠키시마?"
내 상태가 뭔가 이상하단 것을 느꼈는지 진지하게 날 부르는 오이카와상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츠키시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요, 죄송해요. 정말...죄송해요..."
그 말에 내 등을 툭툭 친 뒤 쓸어내리는 오이카와상의 따뜻한 손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배어나왔던 것도 같다.
=
"이젠 좀 괜찮아?" 하면서 물을 축인 손수건을 내미는 오이카와상에게 "감사해요."라 말하며 손수건을 받아든다.
조금 부어오른 눈두덩을 누르면서 "저기, 오이카와상, 죄송..." 하고 말하는데 오이카와상이 내 말을 막는다.
"죄송하단 말 들으려고 같이 있는거 아니니깐."
웃음기가 전혀 없는 표정으로 메뉴판을 내게 넘기는 오이카와상을 올려다보자 "정신 차릴 겸 뭐 좀 마시라고. 주문해올게." 하고 부드럽게 말한다.
표정과 상반되는 목소리에 조금은 마음이 놓여 "그럼 아이스 라떼 마실게요, 돈은..." 하고 지갑을 꺼내자 "내가 살 거니깐 꺼내지 마, 꺼내면 화낼 거야 케이쨩." 하며 오이카와상이 돌아선다.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는데...
오이카와상은 내게 너무 상냥하다.
내 응석을 다 받아주고 내가 힘들 때마다 늘 곁에 있어준다.
스가 선배와의 일 때문에 울고 있을 때 날 위로해 준 것도, 카게야마의 갑작스런 행동에 손을 못 쓰고 있었을 때도, 지금도...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미안함이 밀려와 주문을 하는 오이카와상의 모습을 계속 눈으로 쫓게 된다.
오이카와상이 트레이를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오이카와상을 쫓던 시선을 탁자 쪽으로 돌린다.
어차피 눈치가 빠른 오이카와상이라면 지금의 내 시선까지도 눈치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바라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 라떼."
"고마워요."
"고마운 줄 알면 맛있게 마시고 앞으로는 그런 표정 짓지 마."
묻지 않아도 오이카와상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했는지 알기에 입을 다문다.
하지만 어제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일부러 밝은 척을 하며 "오이카와상은 뭐 시키셨어요?" 하고 묻는다.
"뭐 시켰을 것 같은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오이카와상의 물음에 유리잔을 감싼 그의 손을 바라본다.
가늘고 길면서 곧은 손가락을 느릿하게 훑어보며 시선을 올리다가 오이카와상과 눈이 마주친다.
"일부러 네가 고른 것과 같은 음료를 시켰어. 왜냐면,"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살짝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멈추는 오이카와상의 입술을 바라보며 왜냐고 묻자 "너와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내겐 큰 행복이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한텐 늘 그랬어. 지나가면서 고개를 까딱하는 네 모습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만 하고 지나칠 뿐이지만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마저도 소중했거든. 하지만 점차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 자신은 더 많은 걸 바라게 되지. 지금도 그래." 라는 긴대답이 나온다.
"...무슨 말이에요?"
"만약 내가 너랑 다른 음료를 시켰다면, 난 아마 네게 이렇게 말했을 거야. '케이쨩이 시킨 카페 라떼 마셔보고 싶어' 하면서 네 카페 라떼를 한 입 먹어보고 '케이쨩도 내 음료 마셔볼래?' 했겠지.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케이쨩, 케이쨩 그거 알아? 지금 우리 둘이 간접 키스했다구!!! 이렇게 된 거 이번엔 직접 입을 맞춰볼까~?' 하고 달려들었을 것 같단 말야. 물론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였을거고. 그래서야, 혹시라도 내가 네게 그렇게 행동할까봐 같은 음료를 시켰어."
한 번도 입을 맞추지 않았던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왜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뭔지 직접적인 이유는 모르지만 힘겨워하는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에 저런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정말 오이카와상다운 발상이네요."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 입술을 오이카와상의 입술에 살짝 덮었다가 떼어낸다.
"같은 음료를 시키더라도 상관없잖아요. 서로가 원한다면 입 맞춰도 아무 문제없는걸요."
이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방금 전까지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주체 못 했으면서 쉽게 오이카와상에게 마음을 내주는 자체가 오이카와상에게도 쿠로오씨에게도 못 할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난 사람이다.
힘들 때 옆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하려 기대버리는 나약한 사람이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상이라 고맙고 미안한데 기쁘네요."
분명 아이스 라떼를 마시고 있는데 깔루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 마냥 살짝 취기가 도는 것 같다.
취기라는 말은 맞지 않지만, 정신이 붕 뜨는 것 같고 뺨이 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것이 딱 좋을 정도로 술이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다.
오이카와상과 마주앉아 시덥지 않은 얘기들도 해가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어제처럼 카게야마가 전화를 걸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정신이 현실로 돌아온다.
오이카와상은 딱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전화가 온 것을 신경 쓰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게야마야?" 하고 묻지 않았을테니깐.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을 때 눈에 들어온 글자는 [우카이상]이었다.
주말에 어색하게 헤어져 꿈까지 꿀 정도로 계속 떠올랐던 그의 전화에 오이카와상과 얘기를 나누며 잔잔해져가던 심장이 요동을 치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전화를 받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제 데이트도 내가 카게야마의 전화를 받은 뒤 어색해져 끝나버렸는데 오늘마저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은 축 쳐져있는 내 모습을 보고 오이카와상이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인데 그 손을 잡아놓을 땐 언제고 이제와 뿌리치는 것도 우스운 꼴이니깐.
거기다가 오이카와상과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전화 안 받아?"
자신을 두고 일어설까봐 걱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행동이 전화를 건 상대방에게 실례된다 생각하여 걱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양 쪽 다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은 걱정이 묻어나는 그 물음에 "괜찮아요, 나중에 전화 걸면 되니깐요." 라 대답하며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기본 메시지를 보내 전화를 꺼버린다.
"지금은 오이카와상과 있는 것이 더 중요해요, 오이카와상이었어도 전화를 끊고 제게 집중했을테니깐요. 그렇죠?"
"...정말이지 케이쨩은 순수한 건지 아니면 약은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깐."
"무슨 말이에요, 그건."
"가끔 보면 연애고수 같단 말야. 상대방이 들었을 때 설레는 말이 뭔지, 마음을 흔드는 행동이 뭔지 너무 잘 알아. 계산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랄 때도 있어."
"그래서 싫다는 거에요?"
"아니, 그래도 그런 네가 좋다고."
그 말에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저도 좋아해요." 하고 오이카와상을 보며 웃는다.
카페에 자리를 잡은지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 오이카와상이 날 보며 "이젠 집에 갈 마음이 들었어?" 하고 묻는다.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 표정도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어."
산뜻한 미소를 짓는 오이카와상이 오늘따라 내 시선을 어지럽힌다.
조금 더 저 미소에 기대고 싶다.
하지만 응석을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으니깐, 이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오이카와상."
=
카페에서 나온 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아까보단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런지 여유롭게 나무와 꽃들을 보며 걷게 된다.
4월이 가까워져서 그런 것일까 길가에 못 보던 꽃들도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 세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느긋하게 걸어서 그런지 6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오늘 먹은 음식이라고는 아침 겸 점심으로 쿠로오씨 집에서 먹었던 전골, 오이카와상이 사 준 카페 라떼 밖에 없는데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간단히 씻고 나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내일은 일주일 중 제일 바쁜 날인데다 물리 실험도 있어 예비 보고서를 써야한다.
자필로 작성해야하는데다 자료들을 찾아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바쁜 것이 낫다.
할 일이 없다면 계속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테니깐.
이번 실험 주제가 뭔지 찾아보려 컴퓨터를 켜려다 우카이상에게서 전화가 왔던 사실이 떠올랐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놓긴 했었지만 우카이상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 서둘러 전화를 해본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흐를 때 마다 '혹시 아까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화가 나셨나?'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이번 신호음이 끝나도 안 받으면 어쩌지, 하고 속이 타던 때 "츠키시마냐?"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안녕하세요-"
하지만 막상 우카이상이 전화를 받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엊그제 더 재밌게 놀 수 있었는데 제가 괜히 후타쿠치상한테 발끈하는 바람에... 죄송해요'라는 말도 '그래서인지 꿈에서까지 우카이상이 떠올랐었어요, 전화도 하고 싶었다구요' 하는 말도 어색하다.
어떤 말을 이어나갈지 고민을 하며 입술만 깨무는데 "아까 수업 중이었나, 방해해서 미안." 하고 어색한 웃음이 함께 들려온다.
"별거 아니었는데 전화한거거든."
"별거 아니라뇨?"
내 물음에 잠시 우카이상이 뜸을 들이는 듯 하더니 "그냥 잘 있나 궁금해서." 라는 말이 나오다가 곧바로 "아니아니, 그것 만은 아냐. 엊그제 그렇게 헤어진게 신경 쓰였어." 하고 덧붙인다.
"...그렇게라면..?"
"어른스럽지 못 하게 말했잖냐. 비아냥거리는 말에 대꾸할 수도 있는건데 애 같다느니, 나중엔 좀 퉁명스럽게 대했고. 그게 신경이 쓰여서 담배가 계속 생각날 정도였어."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잘 참고 계셨잖아요."
"그래, 너 때문에 참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다시 필 뻔 했다고. 내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어."
한숨을 쉬며 말하는 우카이상의 목소리를 듣자니 지금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지 눈 앞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다.
"담배 대신에 제가 그 날 드렸던 레몬맛 사탕 있잖아요, 그거 하나 사서 드시지 그랬어요?"
"싫어."
"그렇게 단칼에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요, 맛있는데-"
"네가 와서 준다면 생각해볼게."
그 말에 잠깐 답을 못 하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인다.
얼굴이 붉어진게 느껴질 정도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우카이상 그렇게 안 봤는데 어리광쟁이네요." 하고 틱틱거려본다.
"시꺼 임마, 나이를 먹었어도 어리광 부리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부릴 수도 있는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조금 쑥쓰러워하는 느낌이 어려있어서 그런가 나보다 10살은 많을 그가 귀엽게 느껴진다.
"지금 저한테 어리광 부리셨잖아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치는게 아니죠. 모든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죠."
"그래, 그래. 어리광 부렸다."
"그럼 제가 아닌 다른 사람한텐 안 그래요?"
"...너 좀 집요하다?"
"말해봐요, 우카이상."
살짝 웃으면서 말하자 크읍 하고 침을 꿀떡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그래, 너한테만 그런다. 됐냐?" 하는 대답이 나온다.
우카이상이 이런 사람이었던가, 하고 생각하며 "그럼 지금 갈까요?" 하고 가볍게 말해본다.
장난삼아 한 말이었는데 "너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하고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와 나마저 놀란다.
"거기다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한층 걱정이 묻어나오는 그 말에 이제와 '장난이었어요.'하고 배시시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도 모르게 "죄...죄송해요, 걱정 끼치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하고 말을 잇는다.
"네가 내려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거나 하면 지금보다 더 걱정될거니깐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네가 내려오게 시킬 바에야... 차라리 내가 올라가는 것이 낫지."
뒤에 이어진 말에 "네?" 하고 목에 걸린 소리가 튕겨나간다.
"내가 차 몰고 올라가는게 더 마음 편하다고. 너 내려오면 차 끊길 수도 있어서 난감하지만 난 차가 있으니깐 언제고 내려갈 수 있잖아."
놀려주려고 한 말이 큰 일로 번지는 것 같아 "...아니, 저기 우카이상... 내일도 연습 있을텐데-" 하고 우카이상을 말려본다.
"그렇긴한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우카이상에게 "거기다 위험해요, 우카이상 엊그제 카라스노로 돌아가실 때 마구 달리셨었다면서요. 우카이상이 제가 지금 내려가는 걸 걱정하는 만큼 저 역시 이 시간에 무리해서 우카이상이 올라오시는거 걱정된다구요." 하고 진심을 담아 말한다.
지금 가겠다 말한 것은 장난이 어느 정도 담긴 말이었지만 우카이상을 걱정한단 말은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다.
그 진심을 느낀 것인지 우카이상이 "...네가 걱정하는 것도 마음 편치 않으니깐... 관둘게. 대신... 네가 편한 시간에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저야 금요일에 오전 수업만 끝나면 아무 것도 없긴 하지만... 설마 올라오시려구요?"
"네가 수업 듣는 동안 안전 운전하면서 올라가면 되지, 뭐."
"그러고는 다시 내려가서 후배들 코칭도 하실 거잖아요, 그렇게까지 우카이상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난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저번에 우카이상이 올라왔으니 다시 만난다면 제가 내려가야 맞는 거잖아요."
"힘들텐데-"
"괜찮아요, 대신 레몬맛 사탕 사 갈 거니깐 맛있게 드셔야 해요?"
그 말에 우카이상이 살짝 웃은 것도 같다.
갑작스레 생각지도 못 한 약속이 잡혔지만 우카이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잘 되었단 생각이 든다.
우카이상과의 통화가 순조롭게 끝난 다음에야 컴퓨터를 켜 내일 실험 주제를 보게 되었다.
선운동량 보존 법칙에 관한 실험인데 예비지식도 간단한데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 5번 정도 실험을 반복해야 하는 귀찮음만 빼면 실험 자체도 단순해 금방 끝날 것만 같다.
내일 실험이 끝나면 근처 가게나 역 하나 건너 있는 마트에 들려 우카이상에게 드릴 것이나 사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쓸 내용은 얼마 없는데도 불구하고 방금 전 우카이상과의 통화 때문에 들뜬 탓일까, 썼던 내용을 또 써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보고서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붕 뜬 기분에 짜증도 내지 않고 작성을 완료한다.
=
오이카와 호감도 +3 (따뜻한 손길), +2 (다정함)
오이카와 현재 호감도 = 75+3+2 = 80
우카이 호감도 +3 (어리광)
우카이 현재 호감도 = 24+3 = 27
=
* 오이카와는 츠키시마의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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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번 언급했던 말이지만 다시 한 번 더... "독특한 시스템으로 진행된 연성입니다."
그래서 시점이나 장면 전환이 갑작스레 일어나는 부분이 많습니다ㅠㅅㅠ)... 이 점은 나중에(...) 수정,보완할 예정입니다.
=
한창 맛있게 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 소리에 눈이 떠진다.
뭔가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지만 갑작스레 잠을 깨서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핸드폰을 들고 누가 전화했는지를 확인한 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보고 싶어서."
한 번 연락을 받아주자 집요할 정도로 부딪혀오는 카게야마의 행동에 조금은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 몇 시인데?"
"아홉시야, 이쯤 되면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
"...오후 수업이라 더 자도 괜찮았다고."
칭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는다.
"꿈까지 꾸면서 잘 자고 있었는데 네가 깨웠어."
"오이카와상이랑은 어제 잘 놀았어?"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지 자기 할 말만 해대는 카게야마에게 "네 전화 끝난 다음에 헤어졌어." 하고 말한다.
"원래는 좀 더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 네 전화 때문에 일들이 꼬이는 것 같아. 역시 안 맞아."
"오히려 그게 더 상성이 잘 맞는다는 거 아니겠어?"
"뭔 헛소리야?"
"나랑 같이 있어야 하니깐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게 깨지는 거지. 어때, 이 정도면 꽤 논리적이지 않아?"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는 카게야마가 어이없으면서도 어쩐지 귀엽게 느껴진다.
"바보 같은 면이 귀여워 보일 때가 다 있네."
"지금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칭찬으로 받아들여."
심드렁한 듯 대답하면서도 전화를 붙잡고 씩씩거릴 카게야마를 상상하니 뭔가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살짝 나온다.
"그래도 좋다."
뜬금없는 카게야마의 말에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해진다.
"뭐가 좋다는..."
"네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 오늘 하루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너 정말..."
이상하다, 는 말과 독특하다, 라는 말이 혀끝을 간지럽힌다.
그치만 배구와 관련되지 않은, 나라는 대상에게 호감을 갖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낯선 행동이 싫지만은 않다.
"하루 빨리 네 얼굴이 보고 싶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네 비웃는 듯 한 표정마저도 그리워."
마치 몇 년 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에게 말하듯 토해내는 카게야마의 말들에 잠깐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다 정신을 다잡고는 "우리 얼굴 본 지 일주일도 안 된 거 알아?" 하고 흘러나오는 말들을 막아본다.
"그래도 보고 싶어.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네코마 주장이랑 오이카와상 일을 보고 들으니깐- 하는 말이 이어진다.
"배구 이외에도 부러울 일이 생길거란 건 정말 몰랐었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조금은 날카로우면서도 응석을 부리는듯한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나도 네가 이렇게 말 할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야, 너 지금 나한테 책임 전가하는 거야? 네 멋대로 좋아 해놓고 나서?"
"먼저 네가 나한테 시비만 안 걸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분해."
분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쓰는 걸까 의심이 되면서도 "그래도 좋아한다고, 네 비아냥거리는 말에 화가 날 정도로 속이 뒤집히면서도 더 그 말을 듣고 싶어 견딜 수 없단 말야." 하는 말에 결국 박장대소하게 된다.
카게야마와 직접적으로 알게 된 지 햇수로 4년 차.
처음으로 카게야마와의 대화에서 순수한 의미로 크게 웃은 것만 같다.
가볍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내일 아침에도 전화하면 받아줄 수 있어?" 하는 카게야마의 말에 "답지 않게 부탁조로 말하는 거 안 어울려, 카게야마." 하고 내치면서도 "9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지금처럼은 못 받을 거야." 하고 순순히 일정을 말한다.
"그럼 저녁때라도 전화하면..."
"전화하고 싶을 때 해. 뭘 약속까지 잡아가면서 전화하려고 해?"
"네가 날 거절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어쩜 저렇게 극단적으로 생각이 흘러갈 수 있을까, 저러고도 제왕님 맞아? 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다른 일을 하다 연락이 늦어질 수도 있지만 아예 연락을 대놓고 무시하진 않아."
"그럼 또 연락할게."
"맘대로 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츠키시마." 하고 카게야마가 자신을 부른다.
"...깨워서 미안, 오늘 수업 잘 들어." 하고 자기 할 말만 한 뒤 카게야마가 전화를 끊어버린다.
여전히 저 제멋대로인 언동이지만 날 향한 감정이 섞여있단 것을 알기에 이전처럼 화가 나진 않는다.
"...그럼 일어나볼까-"
오히려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
침대 정리를 마친 뒤 방 한 켠을 보다가 세탁하고 하루 동안 말려놓았던 쿠로오씨의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옷가지들을 개면서 ‘빨리 갖다 드려야하는데...’ 하고 생각을 한다.
쿠로오씨의 일정이 어떨지 모르니깐 멋대로 들고 나가기도 뭐하고 해서 [쿠로오씨, 오늘 시간 되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놓은 뒤 방 안을 둘러본다.
며칠 동안 밖으로 돌아다녀서 그런가 크게 어지럽혀지지 않은 방 안에서 이질적인 물건 하나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지난 주말, 우카이상에게서 빼앗아왔던 담뱃갑이었다.
어색하게 헤어졌던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려서였을까, 버스 안에서 잠시 잠 들었을 때에도 우카이상의 꿈을 꾸고 지금마저도 우카이상의 물건에 신경이 쓰인다.
우카이상에게 어떤 말이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들었던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는다.
무슨 말을 하건 어색한 기운이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아 조금은 시간을 둬야 할 것만 같다.
"쿠로오씨 연락마저도 안 오네."
생각지도 않았던 카게야마와의 통화 덕분에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아간다.
억지로라도 힘을 내기 위해 헤드폰을 쓰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곡목을 훑어 내리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에서 손이 멈춘다.
긴장이 되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마다 클래식을 듣는 습관은 여전하다.
눈을 감은 채 곡에 빠져 들어간다.
복잡한 마음이 풀렸다가 다시 엉켜졌다 풀리는 것이 반복되며 기분이 나아지는 것만 같다.
곡을 다 듣고 난 뒤 핸드폰을 바라보자 쿠로오씨의 문자 한 통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왜 물어보는건데?]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별다른 생각이 없이 [월요일에 빌렸던 옷 돌려드리려구요. 세탁까지 해놨는데 깜박했었어요.] 라 답문을 보낸다.
[오늘은 수업 없어서 한가해. 넌?]
[저도 오늘은 한가한 편이에요. 오후 수업 하나만 있거든요.]
[그래?]
주말 내내 보고 싶었다면서 단 팥앙금을 준비해놓고, 내게 응석도 부리던 모습과는 달리 오늘따라 미적지근한 쿠로오씨의 문자에 오히려 애가 탄다.
먼저 부딪혀오던 쿠로오씨답지 않은 행동에 조바심이 난다.
찬 물을 들이키면서 어느새 말라버린 입술을 축이고는 [만날래요?] 라는 네 글자를 보낸다.
=
[쿠로오 시점]
"켄마, 내려와!"
전골냄비를 내려놓으면서 쿠로오는 위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제 저녁 [전골 먹고 싶어] 라는 문자를 보낸 켄마 때문에 새벽부터 장을 봐 전골 요리를 할 준비는 끝마쳤는데 정작 먹고 싶다고 말한 켄마가 내려오지를 않는다.
"켄마!"
다시 한 번 켄마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며칠 전 새로 나왔다는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녀석 참-"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라간다.
방문을 두드리며 "켄마." 하고 부르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 자판을 마구 누르는 켄마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눈을 반짝이며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켄마, 준비 다 끝났-"
머리를 긁적이며 켄마에게 다가가던 쿠로오는 켄마의 손에 잡혀있는 핸드폰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그제야 인식한다.
자신의 핸드폰에 켄마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임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본 쿠로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켄마!"
빠르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아든다.
츠키시마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 당황해하는 자신을 본 켄마가 "아, 쿠로..." 하고 살짝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왜 이랬는지는 이따 꼭 물어 볼거야, 켄마."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쿠로오는 츠키시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다시 본편 진행]
방금 전까지 대충 문자를 보내던 쿠로오씨가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긴 했지만 일단 통화 버튼을 눌러본다.
"네, 츠키시ㅁ..."
"미안, 지금 문자들 모두 미안!"
쿠로오씨의 다급한 목소리에 "네? 뭐가요?" 하고 반문한다.
"지금 문자들 말이야, 내가 전골 준비하는 동안 켄마 녀석이 답장한 거였다고."
그 말에 지금까지의 상황들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지난번 쿠로오씨와 처음 이 동네에서 만났을 때 코즈메상도 함께 있었다.
그 때 코즈메상은 내게 몇 번 경계심을 보였었다.
혹시라도 소꿉친구를 빼앗아 갈까봐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그치만 오늘 수업 없어서 하루 종일 시간 있는 건 맞아. 만날 수 있어, 아니, 만나자. 지금 우리 집으로 올래?"
"...괜찮은 거에요?"
"뭐가."
"코즈메상이 저한테 질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제가 갔다가 쿠로오씨랑 코즈메상 사이만 어색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켄마한테 말 잘 해놓을 테니깐."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말을 하려는데 "그럼 기다릴게!" 하고 쿠로오씨가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다시 전화를 걸어 안 가겠다 말 할 수도 없고,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쿠로오씨의 옷가지를 담고는 일단 일어난다.
쿠로오씨의 집으로 향하면서 근처 빵집에 들러 코즈메상이 좋아하는 애플파이 여러 개를 집는다.
처음엔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후식을 먹으면서 얘기를 하다보면 분위기가 유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쿠로오씨를 위한 선물 같은 것도 사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하게 된다.
옷을 빌려줬는데 그냥 세탁만 해서 갔다주기는 뭐하고... 그치만 아직 문을 연 상점들이 많지 않은데다 쿠로오씨에게 줄만한 것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대로 쿠로오씨 집을 갈까하고 발걸음을 옮기던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편의점 앞에 쌓아둔 섬유유연제였다.
향도 괜찮고 값도 저렴한 편이라 잘 쓰고 있는 제품을 보자 저걸 사다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
"늦는다 싶더라니 뭘 그렇게 사왔어."
혼내는 듯 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에 문 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 앞에 서있는 쿠로오씨가 보인다.
"...쿠로오씨?"
"혹시라도 기분 상해서 안 오는 줄 알았잖아, 자 봉투 나한테 줘." 하며 손을 내미는 쿠로오씨에게 나도 모르게 봉투들을 넘긴다.
"코즈메상은..."
"얘기 다 했어. 나랑 네가 너무 친해질까봐 그게 좀 걱정 된 건가봐. 아무리 그래도 켄마가 소꿉친구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말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쿠로오씨의 미소에 '그건 아니에요.' 하고 말하고 싶어진다.
소꿉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동안 쌓아왔던 우정에 틈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싫은 거라구요.
마치 내가 야마구치의 연락이 뜸해지면 불안해지는 것처럼 코즈메상도 제가 쿠로오씨랑 친해졌을 때 쿠로오씨가 코즈메상이 아닌 절 선택하는 일이 벌어지는 게 두려워서 그런거라구요.
하지만 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 역시 코즈메상과 같을지도 모른다.
쿠로오씨의 다정함이 내게 좀 더 비춰지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조금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코즈메상이 보인다.
원래도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말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먼저 "안녕하세요, 코즈메상." 하고 목소리를 낸다.
혹시나 인사를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것과는 달리 코즈메상이 "안녕-" 하고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맞인사를 건넨다.
"츳키가 너 먹으라고 애플파이 사들고 왔어, 여기."
쿠로오씨가 코즈메상에게 내가 사들고 온 빵 봉투를 건넨다.
이에 잠깐 코즈메상의 눈이 날 똑바로 응시하다 바로 시선을 떨궈 "고마워." 하고 봉투를 건네받는다.
"자 그럼 빨리 식사를 하자고!"
쿠로오씨가 웃으면서 나와 코즈메상을 데리고 거실로 향한다.
"오늘은 특별히 전골을 준비했으니깐 맛있게 먹자고Wㅅㅇ)!"
자신만만해하는 쿠로오씨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정말 맛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전골냄비 안의 모양은 그럭저럭 이긴한데...
=
전골을 다 먹고 난 뒤 치우려고 하는데 "괜찮아." 하고 쿠로오씨가 손목을 잡아 끈다.
"아까 멋대로 문자 보낸 벌로 켄마가 치우기로 했으니깐."
그치만- 하고 싱크대로 눈을 돌리는 내게 "오히려 먼저 방 안에 올라가 있는 것이 켄마를 도와 주는 거야." 하면서 "애플파이 가지고 먼저 올라갈게." 하고 쿠로오씨가 빵 봉투를 집어든다.
며칠 만에 들어간 쿠로오씨의 방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에 탁자를 꺼내 펴다가 문득 지난 금요일의 일이 떠올랐다.
그저께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왔던 쿠로오씨의 집인데 오늘따라 얼굴이 화끈거리며 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뜨거웠던 입술, 날카로웠던 목의 상처, 밀려올라갔던 윗도리가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다.
"전골은 괜찮았어?"
쿠로오씨의 물음에 사고가 뚝 하고 끊긴다.
"켄마가 먹고 싶대서 만들어봤는데 아무래도 소스 배합을 잘못 한 것 같아서. 원래는 잘 만들 수 있는데- 문자를 멋대로 보냈단 걸 알고 나서 조미료를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막 넣었더니..."
머리를 긁적이는 쿠로오씨가 귀엽게만 보인다.
"너랑 켄마 둘 다 맛있다고 하면서 먹긴 했지만 내가 먹어도 별로였는걸. 너 괜히 오라고 했나봐."
평소 대담하다 못 해 능글맞게 느껴질 때도 있는 쿠로오씨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의외다.
"아녜요, 괜찮았어요."
시무룩한 쿠로오씨를 보는 것은 익숙지 않아 괜찮았다 말하며 쿠로오씨를 다독인다.
"거기다 쿠로오씨가 직접 요리한 거잖아요, 그 정성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말에도 쿠로오씨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다음엔 더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라 말하며 내 옆으로 조금 더 다가온다.
"어떤거 해주실거에요?"
"네가 먹고 싶은거라면 뭐든지. 미리 얘기해주면 밤을 새워서라도 연습해놓을게."
"어려운 디저트 시켜도 다 만들어줄거에요?"
장난삼아 한 말에도 "츳키가 원한다면 이 탁자만한 딸기케이크도 만들 수 있어." 하는 대답이 곧바로 나온다.
무슨 그런- 하고 웃어넘기려다 쿠로오씨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 "기대할게요."라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웃고 있다기엔 조금은 어색하고, 난처한 듯한 표정이 뒤얽힌 쿠로오씨가 날 바라보다 방문을 닫고 탁자 앞으로 돌아온다.
설거지도 다 끝났을텐데 문을 닫는 쿠로오씨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서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코즈메상 들어와야 하는ㄷ..."
하지만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하면서 쿠로오씨가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두 눈을 살짝 감는다.
긴장감에 속눈썹이 떨려온다.
혹시나 코즈메상이 이 모습을 보면 어쩌지, 가뜩이나 어색했던 사이가 더 악화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내게 내려앉는 쿠로오씨의 따뜻한 입맞춤이 기분 좋아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뺨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놓고 싶지는 않아 쿠로오씨의 목을 더 끌어내린다.
하지만 쿠로오씨가 "잠깐, 츳키-" 하고 가로막아 조금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이라뇨?"
"더 하고 싶은데- 하는 아쉬움이 묻어난 표정 말야. 가뜩이나 못 참겠는데 날 자극하지 말아줘."
아까 시무룩해 있던 모습과는 달리 여유가 넘쳐흐르는 쿠로오씨의 말에 두근거리면서도 발끈하게 된다.
"못 참는다면서 왜 멈춘건데요?"
"네가 하두 끌어당겨서 목이 아파. 그러니깐-" 하면서 쿠로오씨가 내 옆에 앉아 날 끌어안는다.
"좀 더 편하게, 좀 더 가까이서 네 입술을 맛보고 싶어."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생각되어 "그러네요,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래, 너무 네 생각만 했어." 하고 쿠로오씨가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쓸어 올릴 머리도 없는데-"
"그래도. 입 맞추고 싶으니깐."
일부러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쿠로오씨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조금씩 쿠로오씨의 입술이 눈썹, 눈두덩, 코끝을 타고 내려오다 내 입술 위에 머무른다.
"이번엔 빨리 안 놔 줄거야. 네가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래."
대답도 듣기 전에 쿠로오씨가 살짝 내 아랫입술을 깨문다.
아프다기 보다는 짜릿한 그 감각에 비음을 흘리며 입술을 열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감은 눈을 살짝 떠 쿠로오씨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통한 것일까, 쿠로오씨가 감고 있던 눈을 조금씩 뜨기 시작했다.
서로의 눈에 맺힌 모습을 보며 혀끝이 맞부딪힐 때 그 달콤함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그걸 눈치 챈 것인지 쿠로오씨가 탁자를 밀어낸다.
그만큼 넓어진 바닥에 나를 조심스레 눕힌 뒤 쿠로오씨가 귓가에 속삭인다.
"조금 더 입 맞출래. 괜찮지?"
지금쯤이면 코즈메상이 정말 올라올지도 모르는데- 하는 불안감이 올라오면서도 내 입술은 제멋대로 "네." 하고 긍정의 말을 내뱉는다.
그럴 줄 알았어- 하고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귓바퀴부터 안쪽으로 따뜻한 숨을 불어넣는 쿠로오씨의 행동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 하고 "흐윽-"하는 소리를 내자 "츳키, 야한 소리-" 하고 쿠로오씨가 웃는다.
'그 목소리와 표정이 더하거든요?'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 대신 "쿠로오씨-" 하며 그의 몸을 꽉 껴안는다.
쿠로오씨의 무게가 온 몸을 짓누른다.
하지만 답답하기 보다는 뭔가 온몸의 신경이 다 곤두서 쿠로오씨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떨림이 멈추질 않아 당혹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긴장한 거야?"
낮게 울려 퍼지는 쿠로오씨의 목소리에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자 "귀여워-" 하며 쿠로오씨가 목줄기를 쓰다듬는다.
"희고 얇아서 조금만 힘을 줘도 자국이 남을 것 같아."
그 말과 동시에 지난번에 키스마크를 남긴 부분을 세게 빨아올린다.
"쿠...로오씨..."
저번에는 그저 놀라서 아프고 무섭단 생각만 들었는데 지금은 온 몸이 쭈뼛 서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자국이 남아서 누가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저리 치워뒀다.
"쿠로오씨..."
그저 쿠로오씨의 숨결이 닿는 곳으로만 감각이 집중되어 녹아버릴 것만 같다.
"왜 불러, 츳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날 부르는 쿠로오씨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쿠로오씨..." 하고 안달이 난 목소리를 들려줄 뿐이었다.
그 목소리에 응답하듯 쿠로오씨의 손이 내 윗도리를 밀어 올린다.
입맞춤에 달아올랐던 탓일까, 급작스런 온도 변화에 차가움을 느낀다.
몸을 떨자 쿠로오씨가 내 상체를 일으켜 등을 쓰다듬어준다.
"괜찮아."
그 말에 거짓말처럼 떨림이 잦아든다.
진정되는 모습을 본 쿠로오씨의 손끝이 척추를 타고 내려오고 그와 동시에 다시금 입을 맞춘다.
얽어지는 숨결만큼이나 달아올라 쿠로오씨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안긴다.
그런 내 몸을 살짝 떼어낸 쿠로오씨가 왼쪽 쇄골을 따라 입을 맞춘다.
두 세번 입을 맞추며 이동하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는 그 행위에 또 다시 비음이 터져나온다.
"벌써 이러면 어쩌려고 그래-"
"...놀리지 마세요-"
자극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하면서도 말은 딱 받아치는 내게 "그래 안 놀릴게." 하며 쿠로오씨가 이마를 맞댄다.
맞댄 이마가 타오르는 것만 같다.
"뜨거워요." 하고 칭얼대자 "나도." 하고 쿠로오씨가 싱긋 웃으며 내 오른손을 잡아 끈다.
"하지만 내 심장이 더 문제야. 느껴져?"
"쿵쾅거리네요."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츳키."
다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쿠로오씨가 입을 맞춰온다.
혀끝을 세워 치열을 훑다가 가볍게 쓸어 올리는 듯 하더니 갑작스레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이 파고 든다.
입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쿠로오씨의 손이 내 뺨에서 시작해 턱선, 목줄기,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저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손길일 뿐인데 어째선지 몸이 달아오른다는 표현이 딱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허벅지 쪽에 무언가 닿고 있는 게 느껴진다.
연애를 해 본 적도, 딱히 누군가를 연애 상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던 나라도 지금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다.
심지어 쿠로오씨가 주는 자극 덕택일까, 나 역시 흥분해 다리 사이의 것이 점차 형태를 바꿔가는 것이 느껴진다.
본능적인 것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 상황이 부끄러워 입술을 비비면서도 제발 쿠로오씨가 눈치 채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츳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어졌다.
"...모른 척 해줄 수는 없는 거에요?"
"이 상황에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귓불을 깨물면서 웃던 쿠로오씨가 잠깐 조용해졌다가 "만져줄까?" 하고 묻는다.
살짝 스쳐지나가는 쿠로오씨의 손가락 때문에 더 견디기 힘들어져 나도 모르게 그만두라고 화를 낼 뻔 했지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코즈메상이 떠올라 "하지마세요, 쿠로오씨. 아래층에 코즈메상이..." 하고 속삭인다.
"걱정할 필요 없어."하며 쿠로오씨가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내 것에 다시 한 번 손을 대려 해 그 손을 붙잡는다.
너무나도 태연한 쿠로오씨의 말투와 행동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뇨, 이러다 정말 코즈메상이랑 사이 나빠지겠어요." 하고 다급하게 외치는데 "켄마라면 아까부터 저기 있었어." 하고 쿠로오씨가 눈웃음을 친다.
"장난하지 마세요!"
"장난 같아? 저기 방문 봐봐."
쿠로오씨의 말을 따라 눈길을 돌렸을 때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코즈메상이 눈에 들어왔다.
짜증을 낸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그 어떤 변화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코즈메상의 행동과 말들이 머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저기, 코즈메상, 이건 그러니깐...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보니깐, 어 그게 그러니깐....그렇지, 쿠로오씨가 갑자기 저한테 넘어져서..." 하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내 위에 올라타 있던 쿠로오씨를 밀쳐낸다.
"야,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기야?" 하고 핀잔을 주는 쿠로오씨를 가볍게 무시하는데 코즈메상에게서 "안 숨겨도 괜찮아." 하는 답이 튀어나온다.
무슨 뜻인지 몰라 코즈메상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쿠로가 널 좋아하니깐."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앞에서 이러는 건 별로니깐." 하고 코즈메상의 눈빛이 번뜩인다.
내 말 뜻을 알았으면 여기서 나가지 그래? 하고 말하는 것 같아 방금 전까지 열기에 차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만 같다.
죄진 사람마냥 밀려올라간 옷을 끌어내리며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간다.
츠키시마! 하고 부르는 쿠로오씨의 목소리도, 방문을 빠져나가는 날 바라보는 코즈메상의 차가운 시선도 다 무시한 채.
쿠로오씨의 집에 올 때만 해도 빌려 입었던 옷 고마웠다고 감사 인사를 하려 했을 뿐이었는데 왜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일까.
더 이상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뒤쫓아 나오는 쿠로오씨를 인지했음에도 길 건너로 무작정 달려버렸다.
=
카게야마 호감도 +3 (상상 → 기분 좋아짐), +3 (박장대소)
카게야마 현재 호감도 = 15+3+3 = 21
쿠로오 호감도 +2 (머리 긁적이는 쿠로오씨 귀여워), +3 (입맞춤), +3 (키스마크+집중되는 감각), –2 (당황)
쿠로오 현재 호감도 = 64+2+3+3-2 = 70
=
* 츠키시마가 쿠로오의 연락을 기다리며 듣고 있는 슈베르트의 곡은 Fantasie in C major, Op. 15 (D. 760) 로 방랑자환상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곡이다.
* 쿠로오가 미적지근한 문자를 보내는 이유는 쿠로오네 집에 놀러온 켄마가 답을 하고 있는거라
켄마가 쿠로오인 척 문자를 보내고 있는 이유는 쿠로는 내 소꿉친구인데ㅍㅅㅍ 라는 마음 때문에
* 쿠로오의 요리 솜씨는 이 세상 요리가 아니다ㅁㅅㅁ 아마 저 세상에 가야 이 음식이 먹을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만 같다ㅁㅅ;;ㅁ 일 정도의 망금이다.
* 켄마는 전골 사달라고 한건데 쿠로 바보ㅍㅅㅍ 라 생각하면서도 표정 변화 없이 먹는다.
* 츠키시마와 쿠로오가 입 맞추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켄마는 아직도 설거지 중ㅍㅅㅍ 인데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이유는 그릇 하나 씻고 5분 쉬었다가를 반복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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