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BS 청황] 테이코 청황데이 기념 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는다. 벌써 일어날 시간인가, 난 아직도 졸리단 말이야. 투덜거리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이제껏 지각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몸이다. 세 번의 이직 끝에 마음 잡고 자리한 회사에서 성실한 사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 시점에 괜히 꾀를 부리다 늦을 수는 없는 일이다. 빨리 씻고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머리가 깨지도록 아프다. 이게 다 어제 부장이 억지로 술을 먹여서 그래. 하여간 그 대머리 아저씨, 나중에 두고 보자 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눈 앞을 바라보았다.
“...어?”
이상하다. 분명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 얼빠져 있는 것 역시 이상하다라는 말에 묶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더 들어왔다. 분명 키세 료타는 맞다. 하지만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중학생 시절과 같다. 스물 여섯, 계속되는 업무에 찌들다 회식 자리까지 끌려갔다 온 바로 다음 날. 자신은 중학생의 키세 료타로 돌아가버렸다.
[6월 8일 테이코 청황 데이 기념 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내게 장난을 치는 것 일까.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일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누가 잠 좀 깨라고 볼을 꼬집어주거나 옆에서 큰 소리로 깜짝 놀래켜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두 눈에 들어온 숫자들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날짜는 내가 생각한 오늘이 맞지만 연도가 다르다. 정확히 10년 전으로 돌아가버린 이 상황이 어디 현실로 보이겠는가. 하지만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중학생의 모습이다. 야근에 찌든 이십 대 중반의 얼굴이 아닌 아직은 파릇파릇한 십대 청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며 “이게 현실이야.” 하고 다짐하듯 말을 내뱉는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교복은 조금 어색했다. 자유분방한 느낌의 회사를 다니다 보니 티 하나에 청바지나 면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이 익숙했던 지라 오히려 격식 있는 옷이 어색해져 버렸다. 이는 교복에도 통용되는 말이었나 보다. 어쩌다 외근을 나가거나 결혼식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곤 넥타이를 맬 일이 없다보니 한 번에 매지지 않는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억지로 잡아 당기며 판판하게 펼 때 였다.
"아오미넷치…?”
어색한 듯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히 자신의 입술 사이를 뚫고 흘러나온 이름은 자신이 이 시절 동경했던 아오미네 다이키였다. 고교 졸업 후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데다 농구와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 학창 시절 함께 농구를 했던 이들을 잊고 살았었다. 심지어 자신이 농구를 했단 사실조차 가끔 까먹기도 했는데… 그 정도로 기억 저 편에 묻어뒀던 아오미네의 이름이 늘 불러왔던 것 마냥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땅바닥을 보고 걷던 아오미네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다.
“키세?”
한 쪽 눈썹을 살짝 밀어 올리며 날 바라보는 아오미네를 향해 걸음을 뗀다. 뭐야? 하고 묻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다가 “오늘 학교 쨀래요?” 하고 말을 건다.
“뭐?”
“아오미넷치, 어차피 학교 가도 공부 안 하잖슴까. 요즘은 연습도 안 하잖아요. 그럴 바엔 나랑 놀아요.”
자신의 말에 아오미네가 어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싫진 않은 모양이다.
“뭐 하고 놀건데.”
* * *
“고작 놀자고 온 데가 여기야?”
“왜요, 시원하고 좋잖아요.”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는 아오미네를 보면서도 마치 눈치 없는 사람인 것 마냥 “함께 걸어요.” 하고 그의 손을 붙잡는다. 마지못해 끌려오는 아오미네의 손을 꽉 붙잡고 길을 따라 걷는다. 오전이라 그런지 공원 안은 한산하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같이 교복을 입은 학생은 없다.
“아오미넷치.”
“왜?”
“우리 같은 학생은 지금 시간에 안 다니나 봐요.”
“당연한 거 아냐, 성실한 애들은 열심히 수업 듣고 있을 시간이라고.”
“에, 아오미넷치라면 학교에 있어도 수업 안 들을 거 잖슴까.”
“…너 오늘 내 신경 긁으려고 작정했냐?”
“장난이에요, 장난.”
피식 웃으면서 잡고 있던 아오미네의 손을 놓는다. 잡고 있을 땐 몰랐는데 손을 놓으니 뭔가 허전하다. 이 시절에 내가 아오미네와 손을 잡고 걸었었나? 아니 그럴 리 없었을 거다. 분명 아오미네라면 질색했을 것이 틀림 없으니깐. 뚱한 표정으로 내 손에 잡혀있다 풀려난 손을 쳐다보는 아오미네를 보며 내 예상을 확신했다.
“나랑 손 잡고 있던 게 그렇게 싫었슴까?”
지금까지 짤막한 말이라도 해주던 그였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경 쓰지 않고 쭉 뻗은 길을 다시금 걷기 시작한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제껏 잊고 살아왔으면서 우연히 예전으로 돌아간 이 시점에서 그와 나름의 의미로 친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매번 1 on 1을 하자 쫓아 다니고 농구에 관한 말만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자신은 예전과는 달리 아오미네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오미네를 향한 이 감정은 무엇일까. 남들과 똑같이 사회에 찌들어가면서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투영한 것일까,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부딪혔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낸 것일까. 어쩌면 시덥지 않을 생각을 주억거리다 길 한 켠에 놓인 자판기로 시선이 꽂힌다. 마침 목이 말렸던 차라 “목 말리지 않슴까? 마시고 싶은 음료수 있으면 뽑아올 테니 말해봐요.” 하고 말한다. 그 말에 아오미네는 “네 것만 뽑아와. 난 한 모금만 얻어 마시게.” 하며 색이 바랜 의자에 앉는다.
“에에, 내 음료수 빼앗아 먹게요?” 하고 칭얼거리면서도 시킨 대로 포카리스웨트 한 캔만 뽑아서 아오미네의 옆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다. 뚜껑을 연 뒤 “먼저 마실래요?” 하고 그에게 건네는데 반응이 없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일까 하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데 “너 오늘 이상해.” 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온다.
“…이…이상하다뇨?”
“뭔가 너답지 않아.”
그 말에 순간 당황한다. 지금의 자신은 키세 료타지만 키세 료타가 아닌, 이미 성인이 된 키세 료타가 중학생의 키세 료타를 연기하고 있는 상황과 다름없다. 그 사실을 아오미네가 눈치챘을…리는 없겠지만 감이 좋은 녀석이다 보니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낀 것 같다.
“평소의 너라면 땡땡이를 치려는 날 붙잡지 땡땡이를 치자 제안하지도 않을 거고 갑작스레 손을 붙잡지도 않을 거야.”
역시 그런가요, 하고 속으로 질문을 하며 아오미네의 얼굴만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더 꺼내려는 듯 달싹이는 입술만 바라보고 있을 때 예상치 못 한 말이 들려온다.
“그렇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어.”
짧은 침묵, 가까워지는 아오미네의 얼굴, 혹시라도 캔을 떨어뜨릴까 나도 모르게 뒤로 뻗는 팔, 코 끝에 닿는 숨결, 살짝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갑작스런 입맞춤에 눈만 또르르 굴리고 있는데 아오미네의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말 그대로 입술만 몇 초 붙었다 떨어진 정도였지만 동성에게 입맞춤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보다 설마 ‘그 아오미네가 부끄러워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오미넷치…?”
그의 이름을 부르지만 또 다시 답이 없다. 그러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먼저 돌아갈게.” 하고 뛰어가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정말이지 오늘은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어쩌면 중학 시절의 나로 돌아가 아오미네를 만나 입을 맞추게 된 일련의 과정들이 우연이 아닌 필연일지도 모른다. 스물 여섯의 나로 돌아간다면,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아오미네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봐야겠단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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